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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프리즘] 권력형 성범죄의 해결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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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개인의 성적 일탈 아닌
자기애·지배욕 얽힌 병리 현상
피해자 익명·독립성 보장하고
제도·문화적 변화 함께 이뤄야
민주당 국회의원 보좌관 성추행 의혹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사실 여부는 법정에서 가려질 문제이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단순히 “했냐, 안 했냐”에 머물지 않는다. 권력이 성적 침해를 가능하게 했는지, 제도가 제대로 막아냈는지, 피해자가 보호받았는지, 앞으로 이런 일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지가 더 큰 질문이다. 한국 사회의 불안과 불신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한편, 지구 반대편 미국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계속된다. 엡스타인 파일로 불리는 방대한 수사 문서가 연일 뉴스에 등장하고 있다. 엡스타인은 미국 뉴욕 출신의 억만장자 금융업자로, 정치인, 재계, 학계, 왕족과 연예계까지 연결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이용해 미성년자 성 착취 시스템을 수십 년 동안 운영한 인물이다. 그의 범죄를 기록한 문서에는 전현직 대통령을 비롯해 왕실 인사들이 등장하는데, 실제로 영국 국왕의 동생 앤드루 왕자가 왕실로부터 ‘왕자’ 칭호를 박탈당하고 거주지에서도 퇴거 조처되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사건의 핵심 당사자인 엡스타인이 2019년 수감 중 사망하며 진실이 묻히려 했지만, 엡스타인 파일 공개와 관련된 논쟁이 격렬해지면서 다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엡스타인 사건은 여전히 “누가 관여했고, 왜 은폐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권준수 한양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석좌교수

권준수 한양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석좌교수

두 사건은 규모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다. 국내 사건은 법적 판단을 기다리는 단일 사건이라면, 엡스타인 사건은 국제적인 미성년 성 착취 네트워크 폭로이다. 하지만 본질은 같다. 권력이 인간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권력 앞에서 약자가 얼마나 취약한지다. 권력형 성범죄는 단순한 성적 일탈이 아니다. 권력은 사람의 사고를 바꾸고, 규칙이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상대를 욕구 충족의 도구로 보는 왜곡된 심리를 키운다. 정신의학은 이를 병적 자기애, 권력 중독, 타인 객체화라 부른다.

그러나 문제는 개인의 심리에만 있지 않다. 엡스타인의 범죄가 수십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변인의 침묵과 구조적 방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경제적, 사회적으로 취약한 청소년이었고, 그를 둘러싼 사회적 네트워크는 엡스타인의 행위를 모른 척하거나 오히려 지원했다. 권력형 성범죄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가 공범이 된 문제다.

해결책도 단순히 처벌 강화로 끝나선 안 된다. 권력관계가 뚜렷한 조직에서는 ‘동의’의 의미가 다르다. 직장, 정치, 군대, 대학 같은 곳에서 피해자의 자유 의지는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법과 제도는 이를 반영해야 한다. 또한 신고와 보호 시스템은 조직 밖에서 독립적으로 운영돼야 한다. 내부 감찰이나 윤리위원회는 이해관계에 얽혀 있기 때문에, 피해자의 익명성과 독립성은 엄격히 보장받아야 한다. 권력형 성범죄는 단순히 성적 욕망과 관련된 도덕성 문제만 아니고 권력, 자기애, 지배욕이 얽힌 병리적 현상이다. 리더십 평가, 심리검사, 공직자 정신건강 교육 같은 예방적 접근 역시 필요하다.

피해자가 폭로함으로써 자신의 생존을 위협받는 문화 역시 바뀌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아직도 피해자는 ‘내가 문제를 일으켰다’라는 낙인을 감당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은 ‘괜히 휘말릴까’를 걱정하며 침묵한다. 엡스타인 사건이 보여준 가장 공포스러운 진실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침묵했을 때 범죄가 얼마나 거대해질 수 있는가라는 사실이다. 권력 앞에서 진실은 얼마나 허약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엡스타인의 이름만 바뀐 사건을 계속 보게 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별 사건의 유죄와 무죄를 떠난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권력이 인간 정신을 어떻게 왜곡하는가, 그리고 사회가 그 왜곡을 관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권력형 성범죄는 개인의 일탈처럼 보이지만, 그 배경에는 구조적 방조, 도덕적 무감각, 그리고 취약한 피해자 보호 체계가 자리 잡고 있다. 사회적 해결은 처벌 강화만으로는 부족하다. 심리학적 이해와 제도적 설계, 문화적 변화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공직자의 권력 사용에 대한 교육, 독립된 신고 시스템, 리더 선발 단계에서의 자기애적 성향 검증, 피해자 보호 체계 강화, 언론·정치적 이용을 배제한 사실 중심 접근 등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권준수 한양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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