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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의 마음 읽기] 겨울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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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 소설가

김도연 소설가

불을 끄고 누운 지 한참이 되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아파트가 아니라 캄캄한 밤의 유배지에 홀로 누워 있는 것 같았다. 겨울밤이면 가끔 벌어지는 일이었다. 왼쪽으로 누웠다가 오른쪽으로 눕기를 반복해도 잠은 다시 찾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무작위로 떠오르는 이 생각 저 생각을 따라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잠은 어디로 달아났을까. 결국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세 시 근처. 잠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책상 앞으로 가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할 수 없이 베개를 두어 개 등 뒤에 받쳐놓은 채 벗어놓은 다초점 안경을 쓰고 핸드폰 속으로 여행을 떠났다. 첫눈 소식을 알리는 카카오톡·페이스북·유튜브·네이버…. 기대와 달리 잠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너무 시려 결국 전등을 켜야만 했다.



잠 못 드는 늙은 귀신이 된 걸까

찬 홍시 파먹고 손톱·발톱 깎고

첫눈은 내리는데 어느새 12월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방이 대낮처럼 밝아졌으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내복 차림으로 발코니에 나가 문을 열고 창밖을 살폈다. 초저녁에 내린 첫눈은 그쳤고 가로등 불빛 속엔 사람들의 발자국만 눈 위에 찍혀 있었다. 저 발자국의 주인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겠지. 동쪽으로 250여 리 떨어진 내 고향 대관령에도 눈이 내렸을까. 대문 밖의 개집은 얼마 전 팔려 간 개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첫눈이 몰고 온 공기가 차가워 고향 생각을 이어가지 못하고 말랑말랑한 홍시 한 알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따스한 방바닥에 주저앉아 나는 이제 눈에 무감하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숟가락으로 홍시를 파먹었다. 홍시는 차갑고, 달고, 떫었다. 나는 이제 점점 고향에서 멀어지는구나, 이런 생각도 하며 손가락에 흘러내린 홍시를 입으로 빨아먹었다. 껍질과 씨앗만 남긴 채 홍시를 다 먹고 나니 이번엔 긴 손톱이 눈에 들어왔다.


방바닥에 네모난 휴지 한장을 깔고 손톱을 깎을 준비를 했다. 나이가 들수록 손톱이 얇아지고 빨리 자라는 것 같다는 느낌은 나만의 생각일까. 오밤중에 손톱을 깎으면 귀신을 부르는 짓이라고 어린 시절에 들었는데 사실일까. 왼손 검지부터 시작해 중지·약지·새끼손가락·엄지 순으로 깎는 게 습관이 된 지 오래였다. 그리고 오른손. 다 깎은 뒤엔 손톱깎이 뒤편의 줄로 모가 난 부분을 다듬었다. 다듬지 않으면 피부를 긁다가 상처가 생길 수 있었다. 기왕 시작했으니 오래전 공을 차다 피멍이 든 못생긴 발톱도 깎았다. 어른들은 밤중에 손발톱을 깎으면 왜 귀신이 붙는다고 했을까. 귀신이 인간의 손발톱을 좋아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까닭을 모르겠는데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휴지에 모은 손톱과 발톱을 어디에 버릴까를 놓고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늘 하던 대로 화장실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설마 물귀신이 되어 꿈속에 나타나진 않겠지. 만약 나타난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혹시 내 모습과 똑같은 건 아닐까. 그나저나 움츠리고 앉아 있었더니 허리로 통증이 몰려왔다. 늙어가는 건가. 나는 겨울밤 잠들지 못하는 늙은 귀신이 되어가는 건 아닐까.

시간은 더디 흘러갔다. 달아난 잠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방바닥에서 책상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책을 읽거나 소설을 쓰려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캔맥주를 홀짝거리며 탁상달력을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12월이었다. ‘어느새’는 계절을 날아다니는 새가 아닐까. 책꽂이에서 옛날 메모 노트를 꺼내 뒤적거렸다. 자그마한 노트 뒤쪽엔 아는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이름들도 꽤 많았다. 이 사람과 나는 어떤 관계였을까. 이 사람은 지금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옛날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온 듯했다. 또 다른 시절의 노트를 꺼내 넘기다가 어느 페이지에서 멈췄다. 지구는 우주의 감옥이라고 주장하는 『외계인 인터뷰』라는 책을 읽다가 흥미가 당겨 메모한 글이었다. 대략 요약하자면 아주 먼 옛날 우주의 어느 별에서는 골칫덩어리 범죄자들을 지구에 가두었고 우리는 그들의 후손이라는 얘기였다. 이걸 믿으란 말인가. 한 해의 끝자락에 도착해 있어 그런지 왠지 믿고 싶어지는 겨울밤이었다. 술기운 탓인가. 달아났던 잠이 조금씩 다가왔다.

발코니에 나가 문을 열고 얼어가는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창살 너머 관리사무소 마당의 게양대에서 태극기가 펄럭거렸다. 잠이 추위에 달아날까 봐 얼른 문을 닫고 내 따스한 감옥으로 들어갔다. 불을 끄고 솜이불 속에서 잠을 청했다. 오만가지 몽상이 별처럼, 눈꽃처럼 피어났다가 명멸하는 길고 깊은 겨울밤의 시작이었다.

김도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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