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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기자의 窓] ‘낯뜨거운 국뽕’ 환단고기

조선일보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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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이 동북아역사재단 업무보고 당시 언급한 '환단고기'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가운데 14일 오후 서울 시내의 대형서점에서 한 시민이 '환단고기' 관련 서적을 펴들고 있다. /뉴스1

이재명 대통령이 동북아역사재단 업무보고 당시 언급한 '환단고기'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가운데 14일 오후 서울 시내의 대형서점에서 한 시민이 '환단고기' 관련 서적을 펴들고 있다. /뉴스1


‘우학도인’이란 주인공이 등장해 “2010년에 통일된 한국이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할 것”이라고 예언한 소설 ‘단(丹)’은 1984년의 베스트셀러였다. 그 책을 낸 출판사가 1986년 후속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출간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 책이 옛 역사서로 소개된 ‘한단고기’였다. 사실은 환단고기(桓檀古記)였지만 ‘환’은 ‘한’으로 읽어야 한다고 우겼다.

그 책은 역사에 관심이 많은 개발도상국 소년이던 필자의 머리를 뻥 뚫고 가슴을 벅차게 했다. 가난하고 비좁은 이 분단국가가, 1만년 전에는 아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다스렸던 ‘환국’이라는 광활한 나라였다니! 더구나 환국은 세계 문명의 시원(始原) 역할을 했다는 것이 아닌가. 뭔가 뜨거운 것이 몸속으로 차오르는 듯했다. 훗날 생각해 보니 이른바 ‘국뽕’이었다. 환단고기는 상상 가능한 ‘국뽕’의 최대치라 할 만했다.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상식이라는 장벽 때문이었다. 그렇게 오래전에 ‘동서 2만 리, 남북 5만 리’를 지배하던 대국이 세상에 어떻게 출현할 수 있었을까? 신석기 시대를 살던 한 민족이 세계를 압도할 무력을 어떻게 갖출 수 있었을까? 당연한 의문 속에 ‘국뽕’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얼마 뒤 그 책이 1979년 이전엔 사실상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알려졌다. 학계에서 위서(僞書·거짓으로 위조한 책)로 결론 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변에선 이때 역사에 대한 흥미 자체를 잃었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환단고기’는 20세기 한국 민족주의의 발흥 과정에서 상고사의 영광을 턱없이 과장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까마득한 조상의 얼이 빛나면 빛날수록 그 이후 대부분의 한국사는 ‘대륙의 영토가 한반도로 축소된 상실과 쇠퇴의 역사’로 격하되는 꼴이 된다.

인간다운 삶을 살고 의미 있는 역사를 이루는 것은 나라의 크기나 군사력과 무관하다는 것을, 타 민족을 강제로 정복하고 지배하는 역사란 결코 자랑스러울 게 없다는 것을, 20세기의 많은 사람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고대 단군 민족이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의 거대 문명을 이뤘다’는 ‘환단고기’의 내용에서 대동아공영권이나 내선일체론의 잔영이 보인다는 사람도 있다. 깡패에게 얻어맞은 학생이 알고 보니 가해자를 흠모한 셈이다.

이것은 극우 세력의 꿈이었을까? 그렇지만도 않다. 2008년 ‘환단고기’의 새 번역본을 낸 인물은 범민련 남측 본부 의장이었던 친북 인사였다. 그는 “다른 력사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뚜렷한 주체 사관을 발견하고 홀로 기쁨에 잠겼다”고 했다. ‘국뽕’에는 좌우도 남북도 없었다. 그런데 이 ‘국뽕’의 최정점이라 할 책을 대통령이 업무 보고 자리에서 언급하고 이것이 역사적인 ‘문헌’이며 책을 둘러싼 ‘논쟁’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넷플릭스보다 재밌기는커녕 낯뜨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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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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