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범 前 국사편찬위원·前 경기대 부총장 |
뜬금없이 환단고기와 ‘환빠’ 논쟁을 대통령의 발언에서 듣게 돼 무척 놀라고 당황했다. 왜 철 지난 위서(僞書) 진위 논쟁이 21세기의 4분의 1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나왔을까? 배경은 ‘전국역사단체협의회(역단협)’다. 역단협은 환단고기를 진서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많은 대표적인 단체다. 전문 역사 연구 기관이라기보다는 민족사관을 앞세워 정치적 활동을 하는 시민 단체다. 이 단체는 그동안 동북아 역사 지도 폐기, 가야 고분군 유네스코 등재 내용 수정, 전라도천년사·김해시사 부정 등 주로 주류 역사학계에서 이룩한 연구 결과에 대해 민족사관을 바탕으로 반대 투쟁에 성공한 사례를 대표적인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역단협은 대선 직전인 2025년 5월 22일 민주당과 국회의원회관에서 정책 협약을 맺었다. 그리고 전격적으로 이재명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민주당에서는 남인순, 정일영 의원이 참석했다고 한다. 일부 역사 관련 학회에서 이를 알고 5월 29일 민주당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결론은 대통령 선거 이후로 미뤘다.
그 뒤 역단협은 지난 8월 28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역사 바로 세우기 범국민 전진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중요한 주제 하나가 ‘대통령 역사 공약 실천’이었다. 대통령 공약 가운데 하나이던 ‘학교 역사 교육 강화 및 역사 연구 기관 운영의 정상화’ 실천을 촉구했다. ‘정부는 역사 기관들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고, 청문회를 거쳐 기관장의 역사의식을 검증하는 것을 법제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특히 동북아역사재단을 중국 동북공정을 옹호하는 식민사관 옹호 기관이라고 지적하며, 고려의 북쪽 국경선이 심양에서 공험진에 이른다고도 했다. 또 다른 발표에서는 광복 후 북한은 김일성이 파견원을 남쪽에 보내 김석형·백남운 등을 데려가 식민사관을 청산했으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해 친일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김씨 세습 왕조를 찬미하는 주체사관을 민족사관으로 인정한다고 확대 해석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보건대, 대통령의 환단고기 환빠 논쟁 발언은 느닷없이 나오지는 않은 것 같다.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에게 질문한 것도 의도하지 않았을까 싶다. 역단협의 행사에서 거론된 내용과 대통령의 발언이 일부 상통하는 바가 있어 보인다. 뜬금없이 철 지난 환단고기 논쟁을 꺼낸 것이 아니라, 역단협과 민주당의 정책 협약 이행과 대통령 공약 실천을 위해 계획된 발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정학(政學) 유착’이라고 해야 하나? 기우이기를 바란다.
역사 사실은 문헌이나 유물 고증 등 여러 과정을 거친 학문적 결과로 얻어진다. 그래서 학문의 목표는 미래 지향이지만, 결론은 안전해야 한다. 한두 개 단어나 문장으로 일반화한 것은 선동이자 허구로, 미래를 불안하게 한다.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할 때의 역사는 철저한 연구 결과로 얻어진 사실에 근거한다. 사실이 거짓이라면 그 역사는 망상이다. 망상을 믿는 민족의 미래는 없다. 사관(史觀)에 얽매이지 말고 사실(史實)에 충실할 때다.
환단고기는 위서 판정을 받은,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창작물이다. 이를 역사서로 취급할 수 없다. 물론 일부의 환단고기를 믿고 싶어 하며, 위대한 상고사를 갖고 싶어 하는, 심정적 동기는 이해한다. 그러나 거짓말을 맹신하게 하는 선조가 돼서는 안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지만, 거짓말을 믿는 민족은 반드시 망한다’는 새로운 격언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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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범 前 국사편찬위원·前 경기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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