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까기 인형'의 한 장면/국립발레단 제공 |
김장철이다. 이 집 저 집 김장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나는 김장을 하지 않지만 지인들이 나눠 준 겉절이를 얻어먹으며 겨울을 맛본다. 두툼한 배추에 집집마다의 비밀 병기 양념이 어우러진 김치를 밥 위에 올려 먹으면 한 해의 풍요로움이 입안 가득 퍼진다.
계절은 삶의 의례처럼 반복된다. 길모퉁이에 군고구마와 붕어빵 냄새가 스밀 때 우리는 겨울이 왔음을 몸으로 안다. 두꺼운 옷과 이불을 꺼내는 게 귀찮지만 그새 낡아버린 것을 골라내며 시간의 흐름을 감각한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또 하나의 의례는 발레 ‘호두까기 인형’이다. 함박눈과 크리스마스트리, 달콤한 케이크와 캐럴이 이어지면 조건반사처럼 이 작품이 떠오른다. 우리는 왜 겨울이 되면 ‘호두까기 인형’이 보고 싶어질까.
조건반사가 성립되려면 반복 학습이 필요하다. ‘호두까기 인형’은 1892년 12월에 초연되긴 했으나 특정 계절에 묶인 작품은 아니었다. 전환점은 1958년이다. 크리스마스 당일, 미국 CBS 방송국이 뉴욕시티발레단의 ‘호두까기인형’을 전국에 컬러 생중계하면서 미국 가정의 거실마다 스며들었다. 이후 12월마다 수많은 발레단이 이 작품을 공연하면서 ‘크리스마스=호두까기인형’이라는 공식이 대중에게 각인됐다. 김장이 한 해의 식탁을 책임지듯 ‘호두까기인형’은 발레단의 한 해 살림살이를 지탱하는 작품이 되었다.
11월부터 길게는 1월까지 공연장을 점령하다 보니 겨울마다 창작이 마비된다는 비판도 뒤따랐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 기간, 수십 년 만에 ‘호두까기인형’ 없는 겨울을 겪으면서 알게 되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되돌아오는 의례가 삶을 지탱케 함을.
무용수로 활동하던 시절, 나에게 겨울은 곧 ‘호두까기인형’을 의미했다. 공연 기간이 짧은 무용계에서 매년 같은 계절에 두어 달을 꼬박 한 작품과 보내는 건 특별한 경험이다. 유명한 작품은 반복해서 공연되기 마련이지만 이 작품은 규칙적으로 찾아오기에 발레 무용수의 시간을 새기는 나이테와도 같다. 아기 생쥐나 장난감 병정으로 무대에 서던 어린이가 성인 무용수가 되었다가 어느새 은퇴한다. 한 작품 안에서 무용수의 삶이 압축된다.
반복이 정체를 뜻하는 건 아니다. ‘호두까기 인형’은 늘 같은 자리에 머무르지 않았다. 원작을 과감하게 뒤엎은 현대적인 버전이 등장하는가 하면, 고전적인 형식을 유지한 작품도 시대의 미감과 감수성에 맞게 이곳저곳 손본다. 매년 담그는 김치 맛이 다르듯 ‘호두까기 인형’도 매년 다르게 만들어진다. 올해 ‘호두까기 인형’의 맛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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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옥희 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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