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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거리두기]과거의 죄가 현재를 덮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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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죄가 아무 탈 없이 편안하게 살아온 어떤 사람의 현재를 덮칠 때, 우리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다. 과거의 죄를 용서하고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부여해야 하는가, 아니면 다시는 그런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과거를 기억해야 하는가? 지난 몇년 동안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직자·유명인·지도자들이 청소년 시절의 폭력·범죄 전력으로 비난을 받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사건이 잇따랐다. 법적 처벌을 이미 마쳤고 이후 수십년 동안 사회적으로 기여한 인물들까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과거의 잘못과 허물을 어디까지 현재의 책임으로 돌릴 것인가? 이 오래된 질문이 다시 우리에게 던져졌다.

최근 한 인물이 30여년 전 미성년 시절 저지른 중범죄가 뒤늦게 밝혀지면서 사회적 비난 끝에 직책에서 물러나는 일이 있었다. 법적 처벌을 이미 마쳤고, 이후 오랜 기간 성실한 삶을 살아왔음에도 과거의 죄는 무거운 주홍글씨가 되어 다시 그를 덮쳤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절도와 성폭행 관련 사건 등에 연루돼 소년원 처분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이미 형을 마쳤고, 이후 모범적인 삶을 살며 자신의 활동 분야에서 명망을 쌓았다. 그런데 한 언론이 그의 소년 과거를 폭로하자,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공적 활동을 그만두고 물러나야 했다. 그는 은퇴 성명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우리 현실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유형을 기반으로 구성한 가상의 사례일 수 있다. 문제가 된 인물은 정치인일 수도 있고, 교육자와 종교인일 수도 있고, 배우·가수와 같은 유명인사일 수도 있다. 그 인물이 말과 행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는 빈도가 높을수록 더 높은 도덕적 관심과 비난을 받는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공적 역할을 담당하는 ‘공인’일 가능성이 크다. 그가 담당하는 역할이 사회적으로 더 높은 도덕성과 책임 의식을 요구할수록 사람들은 더 많은 도덕적 일관성을 기대한다. 현재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의 과거도 도덕적으로 온전하고, 미래에도 역시 도덕적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사회는 과연 어느 시점까지 과거를 소환해 개인의 현재와 미래를 규정할 것인가? 바로 이 질문이 최근 배우 조진웅의 과거 이력과 관련된 논란의 핵심이다. 처음 이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과거를 들춰내 좋은 배우 한 명의 삶을 망가뜨린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가 과거에 저지른 범죄의 실상이 하나둘씩 밝혀지자 죄질이 너무 나쁘다는 생각이 들어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과거 소환 시점’이 논란의 핵심

그러다 김어준이 조진웅을 장발장에 비유하고, 이 사태를 소위 선수들이 작업을 친 ‘정치적 타기팅’으로 규정하면서 진영 논리에 기반한 선전과 선동으로 논점을 흐리는 것을 보면서는 분노를 느꼈다. “누가 왜 이 시점에 이걸 터뜨렸는가?”라는 정치적 프레임으로는 이 문제를 해명하기는커녕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도덕적인 척하면서 속속들이 썩어빠진 정치꾼들은 언제나 음모론으로 과거의 죄를 덮으려 한다.

범죄에는 언제나 피해자가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범죄로 인해 피해자의 삶이 망가졌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손해 또는 불법 행위가 발생했을 때 그 불평등을 원래 상태로 복구하는 정의를 ‘시정적 정의’라고 부른다. 누군가가 받은 고통과 손해를 적절한 보상과 배상을 통해 평등 상태로 복구하려는 것이다. 고대사회는 피해자가 직접 가해자에게 되갚는 복수의 행위를 통해 균형을 회복하려 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은 시정적 정의의 자연적 형태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수 행위는 끊임없는 폭력의 악순환을 가져올 수 있는 까닭에 중립적인 국가 권력이 대신해서 시정적 정의를 실행한다. 범죄가 일어나면, 두 가지 피해가 발생한다. 하나는 피해자의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 훼손이며, 다른 하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정의감과 정의로운 법질서의 훼손이다. 우리가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의 범죄 행위에 분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설령 과거 한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범죄 이후 성숙한 사회인으로 성장하였다고 하더라도, 과거의 범죄 행위가 폭로되면 사람들은 다시 시정적 정의가 충분히 실현되었는지 묻게 된다. “나는 지난 30년 동안 이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 그러나 사회는 나를 용서하지 않는 듯하다.” 과거의 죄로 현재의 삶이 부정당한 사람은 아마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미성년 시절의 죄를 성년의 삶에 무기한 적용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 ‘숨겨진 과거’는 공공의 신뢰와 정의감을 위협하는 요소인가? 과거의 범죄를 다시 문제 삼는 사람들은 범죄는 잊히거나 사라질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회적 책임은 시효가 있는 게 아니라 ‘도덕적 기억’에 의해 규정된다. 아동학대, 학교폭력, 성폭력과 같은 중범죄는 가해자의 인격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피해자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강간, 강도와 같은 범죄의 피해자가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수많은 사례를 생각해보라. 피해자의 고통이 잊히지 않는 한, 범죄가 사회에서 잊히면 2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과거의 죄로 현재의 삶을 처단하는 것은 주홍글씨의 사회적 낙인을 찍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소년범이 훌륭한 배우이자 성숙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스토리는 우리 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이야기인가?”라는 김어준의 질문은 물론 타당하다. 법적 처벌을 받았는데도 과거의 죄로 낙인을 찍는 것은 두 번째 형벌과 같다.

책임과 용서 사이의 균형 필요

사람은 지난날의 죄를 뉘우치고, 허물을 고쳐, 올바르게 살 수 있다. 개과천선이라는 인간의 도덕적 변화 가능성을 믿는다면, 우리는 범죄자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주어야 한다. 한 번 저질러진 행위는 결코 되돌릴 수 없다. 과거의 행위로부터 구제되어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오직 용서뿐이다. 정치철학자 아렌트가 말한 것처럼 용서하지 않는 사회는 계속 과거에 발목이 잡힌다. 그러나 누구도 스스로 자신을 용서할 수는 없다. 피해자만이 가해자를 용서함으로써 자신도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과거의 죄가 현재를 덮칠 때 발생하는 도덕적 딜레마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과거의 죄는 진실이며 사회는 이를 알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정의’의 관점과 인간을 하나의 잘못으로 영구히 단죄하는 것은 잔혹하다는 ‘자비’의 관점이 충돌한다. 이 두 견해는 모두 일리가 있다. 한쪽의 주장만으로 사안을 판단하기에는 문제가 도덕적으로 매우 복잡하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흑백논리가 아니다. 과거의 죄를 기억하는 책임과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인정하는 용서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 특히 미성년기 범죄에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 사회가 갱생의 가능성을 차단한다면 오히려 재사회화를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비례성이다. 범죄 이후의 삶이 도덕적으로 과거의 범죄를 잊게 할 정도로 온전해야 한다. 범죄자라도 도덕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유사한 범죄 행위가 반복되지 않는 ‘기간의 깊이’가 있어야 하며 책임감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변화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 변화의 궤적이 사건 자체를 망각하게 할 정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굶주리고 있는 누나와 7명의 조카를 위해 빵 한 덩이를 훔친 ‘장발장’의 범죄는 빈곤 범죄이다. 그에게 돌을 던질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해되고 용서할 수 있는 범죄이다. 빵집 주인이 그의 범죄를 기억할까? 은식기를 훔쳐 달아난 자신을 감싸며 은촛대까지 더 가져가라는 주교의 한마디에 인생을 바꾼 장발장은 훗날 이름을 바꾸고 자비를 베풀며 성실히 살아간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 자신을 숨기지 않고 진실을 밝히며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려는 자세를 보인다.

지금 논란이 되는 배우의 과거 범죄가 장발장처럼 쉽게 용서되고 잊힐 수 있는 것인가? 그는 그 이후 정말 변해서 유사한 행위를 보이지 않았는가? 그는 과거의 죄를 은폐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에 따라 도덕적 딜레마는 해소되고, 정의와 자비의 균형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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