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의 국민연금공단 건물./뉴스1 |
국민연금의 기금 규모는 세계에서 셋째로 크다.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13~15위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규모다. 1988년 도입된 후 연금을 타 가는 사람보다 연금 보험료를 내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기금은 2053년까지 계속 커지고, 해외에 투자되는 비율은 현재 58%에서 65%로 올라갈 것이어서 점점 더 많은, 어마어마한 금액이 환전될 것이다. 최근 원·달러 환율의 고공 행진에 국민연금이 주목받는 이유다.
환율이 오른 것은 원화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는 뜻이다. 달러화뿐만 아니라 유럽연합의 유로화, 중국의 위안화에 비해서도 약해졌다. 일본 엔화가 유일하게 원화보다도 약해졌지만 엔화 가치가 상승할 수 있는 정책적 변수들이 있어서 앞으로는 알 수 없게 됐다. 우리나라가 주로 교역하는 나라들의 통화 가치와 교역량을 반영해서 원화의 가치를 평가한 명목실효환율을 보면, 현재 상황은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버금간다. 뚜렷한 위기가 없는데 원화가 약해졌으니 더 불안한 것이다.
원화가 약해지면 우리 것은 싸게 팔고 외국 것은 비싸게 사게 된다. 우리 것이 싸지니 수출에는 유리하지만 그 효과가 민생에 체감될 길은 멀다. 수출 기업들의 실적이 좋아지고 주가가 오른다고 당장 고용이 늘거나 소득이 올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생활 곳곳에 스며있는 수입품이 비싸지는 게 훨씬 즉각적이고 힘들다. 그래서 정부가 환율을 걱정하고, 물가 안정이 목표인 한국은행이 빈번하게 거론된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국민연금에 도움을 청하는 상황이다.
국민연금이 환율을 방어할 동기가 있을까. 국민연금이 돈을 굴린 실적은 원화로 평가된다. 원화가 약해지면 국민연금이 외화 자산을 운용한 성과에 변화가 없어도 원화로 환산한 값이 커진다. 국민연금 입장에서는 환율이 올라가서 오히려 좋은데 환율을 떨어뜨리는 데 협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명분이다. 국민연금법 제1조에 국민연금의 목적은 국민의 생활 안정과 복지 증진으로 정해져 있다. 국민연금이 일부러 환율을 떨어뜨려 국민에게 연금으로 돌아갈 재원을 줄였다는 비판을 받게 되면 그들로서는 큰일이다.
하지만 최소한 국민연금은 환율 변동의 위험을 피하는 노력을 해야 하고 그에 합당한 체계를 갖춰야 한다. 환율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따라서 너무 올랐다 싶으면 내려갈 것에 대비해야 한다. 그러한 대비 수단이 최근 자주 언급되는 ‘환 헤지’다. 환 헤지는 미래에 적용될 환율을 미리 고정하는 계약이다. 지금 환율이 높아 앞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국민연금은 비용이 좀 들더라도 미래에 원화로 바꿀 달러화에 환 헤지를 해 두는 편이 유리할 수 있다. 미래에도 지금의 높은 환율로 원화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같은 거대 기금이 환 헤지를 하면 환율은 떨어진다. 국민연금에 환 헤지를 판매한 금융회사가 충분한 원화를 미리 확보하기 위해 달러화를 시장에 내놓아서 그렇다. 국민연금이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하는 행위가 결과적으로 환율을 방어하는 셈이다. 그런데 특히 외국계 금융기관들 사이에서 국민연금이 원·달러 환율 몇 원에서 환 헤지를 시작하는지가 포함된 ‘공식’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몇 원부터 환율이 떨어질지 알기 때문에 주식으로 공매도를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쉽게 돈을 벌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외국계 큰손들이 그렇게 돈을 버는 과정에서 환율이 다시 오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환율이 높을 때 달러화를 빌려 팔고 환율이 떨어질 때 달러화를 사서 갚으면, 달러화 수요가 생기고 환율이 오르게 된다. 만약 환율이 환 헤지를 시작하는 수준까지 또 오르면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 그럼에도 국민연금이 환 헤지에 공식을 정해놓고 따른다면 그 이유는 판단의 책임을 줄이기 위해서다. 결정이 어렵고 책임이 무거울 때 기계적으로 따를 게 있다면, 손발은 묶여도 속은 편하기 때문이다.
환율을 움직일 힘을 가진 국민연금이 이런 식으로 책임을 피한다면 곤란하다. 환율 안정의 짐까지는 명시적으로 지지 않더라도 빤히 읽혀 ‘호구’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 국민연금의 책임 있는 결정을 막는 게 정치적 부담을 야기하는 제도 때문이라면, 그러한 제도는 반드시 찾아 바꿔야 할 것이다. 국민연금은 국민에게 안심하게 하는 버팀목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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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세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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