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집필할 때 이야기다. 집필자 가운데 누군가 일제강점기 특별 코너에 공사(公私)에 걸쳐 활동했던 여성들의 삶을 여러 방면에 걸쳐 소개하자고 제안했다. 전근대에서는 여성 개개인의 삶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매우 부족하여 개인적으로 소개하기가 쉽지 않지만 근현대에는 적지 않은 자료가 있다는 점을 고려한 가운데 남성 위주의 역사 서술 방식에 조금이나마 균열을 가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였다.
이에 여러 공동 집필자가 동의했고 곧이어 인물 선정에 들어갔다. 일단 익히 알려진 여성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는 제외되었다. 독립운동 지면에 들어간 유관순, 김마리아 그리고 1930년대 노동운동에서 언급했던 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이 그들이다. 그리하여 마지막까지 오른 인물은 무용가 최승희, 사회주의 운동가 주세죽, 그리고 서양화가 나혜석이었다. 이어서 제안자는 이들 인물의 삶을 소개하는 글을 1쪽에 걸쳐 썼다. 필자 역시 어떤 글이 나올까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하기도 했는데 출판사 편집진이 제공한 사진과 공들인 디자인 덕분에 학생들이 이들 세 인물의 삶에 공감하든 공감하지 않든 여전히 여성 예술가와 활동가에게 가혹한 당시의 분위기와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여성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 집필진의 소망과 달리 이 교과서 심사본은 검정심의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해 탈락하고 말았다. 왜 탈락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우리의 역량 부족이라고 자책하며 그 세 인물이 학생들과 만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아쉬운 마음을 접었다.
그럼에도 필자는 그가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로서 조혼과 가부장제를 비판하고 여성의 자아의식을 펼쳤지만 불륜과 이혼으로 사회로부터 차갑게 외면받다가 1948년 12월 10일 추운 겨울날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시립 자혜병원에서 무연고자로 발견되었다는 사실만 그저 아는 정도였다. 근래에 들어와 몇몇 미술사 연구자와 여성 역사가들의 노력으로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예술에 관해서 많이 알려졌고 심지어 경기도 수원에서는 ‘나혜석 거리’니 ‘나혜석 거리 맛집’이니 하며 그의 이름을 차용하여 관광 브랜드로 활용하고 있지만 그는 1990년대 전까지만 해도 철저히 잊힌 신여성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여러 공동 집필자가 동의했고 곧이어 인물 선정에 들어갔다. 일단 익히 알려진 여성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는 제외되었다. 독립운동 지면에 들어간 유관순, 김마리아 그리고 1930년대 노동운동에서 언급했던 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이 그들이다. 그리하여 마지막까지 오른 인물은 무용가 최승희, 사회주의 운동가 주세죽, 그리고 서양화가 나혜석이었다. 이어서 제안자는 이들 인물의 삶을 소개하는 글을 1쪽에 걸쳐 썼다. 필자 역시 어떤 글이 나올까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하기도 했는데 출판사 편집진이 제공한 사진과 공들인 디자인 덕분에 학생들이 이들 세 인물의 삶에 공감하든 공감하지 않든 여전히 여성 예술가와 활동가에게 가혹한 당시의 분위기와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여성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 집필진의 소망과 달리 이 교과서 심사본은 검정심의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해 탈락하고 말았다. 왜 탈락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우리의 역량 부족이라고 자책하며 그 세 인물이 학생들과 만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아쉬운 마음을 접었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
그러나 이제는 어느 도서관에 가든 나혜석에 관한 책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에 관한 저서가 다수 나오고 독자들이 찾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여전히 여성의 역사에 관한 연구가 매우 일천한 현실에서 고무적이고 바람직하다. 그만큼 오늘날 독자들이 여성으로서 그의 삶과 예술활동에 공감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그가 1921년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뒤 최초로 열었던 개인전에 5000여명의 관람객이 몰려들었고 20여점의 그림이 고가로 팔렸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오늘날의 이런 현상도 일종의 팬덤 현상이 아닌가 괜한 걱정도 든다. 나아가 중산층 여성에 대한 관심이 지나친 나머지 강주룡 같은 여성노동자나 현앨리스 같은 분단의 경계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흐르지 않을까 하는 기우도 든다. 그리고 스스로 필자의 삶을 되돌아본다. 논문 기고와 연구 과제를 핑계 삼아 ‘우리의 일’을 소홀히 하고 있지 않은가.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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