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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의 호남통신] 침몰하는 여수 석유화학 단지, 민주당은 나 몰라라 하나?

조선일보 박은식 내과 전문의·호남대안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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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용 전기요금 내리고 노란봉투법 등 민주당 정책 재검토해야
호남 대표산업 살리려면 김대중처럼 이념 접고 실용 정책 펴길
출근길 직장인들의 커피가 담긴 무수한 플라스틱 컵들은 다 어디서 생산된 원료로 만들었을까? 바로 전라남도 여수 석유화학공단의 에틸렌이다. 여수는 흔히 노래 속 ‘밤바다’로 기억되지만, 진짜 모습은 대한민국 석유화학의 심장이다. 심지어 여수석유화학고등학교가 있어 졸업생들이 LG·롯데·한화 같은 대기업에 곧바로 취직할 정도다. 여수가 중심이 된 석유화학산업은 지난해 경제 기여액 기준으로 반도체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국가 기간산업을 떠받치는 축인 셈이다. 이순신이 언급한 ‘약무호남 시무국가(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가 지금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여수가 증명해 왔다.

일러스트=이철원

일러스트=이철원


그러나 이 핵심 산업에 빨간 경고등이 켜졌다. 중국발 과잉 생산에 더해 산유국인 중동마저 직접 기초원료를 생산하면서 가격 경쟁력이 무너진 탓이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올 상반기에만 1조8000억원 적자를 기록했고, 여천NCC 부도설까지 나돌았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석유화학 기업 절반이 3년 안에 문을 닫을 것이라는 충격적인 보고서를 냈다. 한때 평균 연봉 1위를 기록하며 지역 경제를 지탱한 여수 석유화학 기업들의 장기 불황은 지방세 수입 급감, 하청업체 도산, 골목 상권 침체라는 재앙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5월에 여수를 ‘산업 위기 선제 대응 지역’으로 지정해 긴급 자금을 투입하고 협력업체·소상공인에 대한 정책 금융 지원을 강화했다. 8월에는 에틸렌 생산량을 최대 25% 감축하고 범용 제품 대신 고부가가치 스페셜티 제품 생산으로 전환하는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했다. 국회도 고용안정지원·연구개발·인허가 특례 및 공정거래법에서 제한하고 있는 기업 간 ‘정보 교환’과 ‘공동 행위’에 대한 조건부 허용과 기업 결합 심사 기간을 120일에서 90일로 단축하는 내용을 담은 ‘석유화학산업의 경쟁력 강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17일 오후 국내 최대 석유화학 산업 단지인 여수국가산업단지. 과거 끊임없이 연기를 내뿜던 산업 단지 내 공장들은 적막한 모습이다. 지나가는 사람을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중국발 덤핑 공세와 글로벌 수요 감소 등으로 석유화학 산업이 휘청이며 여수 지역 경제도 붕괴 위기에 놓였다./김영근 기자

17일 오후 국내 최대 석유화학 산업 단지인 여수국가산업단지. 과거 끊임없이 연기를 내뿜던 산업 단지 내 공장들은 적막한 모습이다. 지나가는 사람을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중국발 덤핑 공세와 글로벌 수요 감소 등으로 석유화학 산업이 휘청이며 여수 지역 경제도 붕괴 위기에 놓였다./김영근 기자


지역 정치계는 환영했지만 지역 경제계는 시큰둥한 반응이다. 가장 절실하게 요구한 산업용 전기 요금 인하가 빠졌기 때문이다. 여수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산업용 전기 요금이 지난 4년간 80% 급등해 여수산단에서 내는 전기 요금이 무려 2조1700억원에 이르러 기업들이 감내할 수 없다고 한다. 근본적 원가 절감을 통한 경쟁력 회복이 아닌, 2년간 일회성 지원으로는 산업을 살릴 수 없다는 절규다.

정부는 산업 간 형평성과 한전의 재정 상황을 이유로 난색을 표한다. 이해 못 할 결정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를 먹여 살려온 산업을 이대로 고사시킬 수는 없다. 기업은 주주의 것이지만 산업은 국가의 것이기 때문이다. 석유화학 산업은 철강과 함께 제조업의 쌀이자 호남을 대표하는 기간산업이다. 2021년 요소수 대란을 떠올려 보자. 경쟁력이 없다고 생산을 포기하고 중국에 의존한 결과, 공급 중단 사태로 물류가 마비됐다. 석유화학 산업을 포기하면 커피를 담는 플라스틱 컵을 포함해 많은 제품의 가격이 폭등하는 더 큰 재앙이 닥칠 수 있다.

산업용 전기 요금 인하를 위해서는 발전 단가가 가장 낮은 원자력의 비중 확대가 불가피하다. 아울러 기업의 펀더멘털을 향상시킬 정책도 병행해야 한다. 노란봉투법,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중대재해처벌법, 주 52시간제 등에 대해 전면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호남의 핵심 산업을 살리려면 역설적으로 호남이 기반인 민주당의 핵심 정책들을 포기해야 하는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말이다.


사전투표소에 줄 선 시민들    (여수=연합뉴스) 조남수 기자 = 제21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29일 오전 전남 여수시 주암마을회관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서 시민들이 줄 서 있다. 2025.5.29     iso64@yna.co.kr/2025-05-29 08:28:19/<저작권자 ⓒ 1980-2025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사전투표소에 줄 선 시민들 (여수=연합뉴스) 조남수 기자 = 제21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29일 오전 전남 여수시 주암마을회관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서 시민들이 줄 서 있다. 2025.5.29 iso64@yna.co.kr/2025-05-29 08:28:19/<저작권자 ⓒ 1980-2025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과거 민주당과 전라도민은 지역 낙후의 원인을 군부 정권 시절 경상도 중심의 산업 투자에서 찾았다. 그러나 그 산업 시설을 짓기까지 군부 정권과 경상도민들은 정말 어려운 상황을 이겨냈다. 포항의 제철산업을 비롯해 산업 현장마다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고난과 희생의 서사가 스며들어 있다. 심지어 자금난에 처한 기업들을 살리기 위해 사채 이율 동결 같은 어려운 결정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자본을 축적해 박정희 정권 때 지어진 여수 석유화학 단지를 호남 기반의 민주당 정권이 지켜내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 상황의 특수성만 고집하며 세금만 뿌려서는 경제를 살릴 수 없다. 경제를 이끄는 기업을 살리기 위한 보편적 접근 방식을 택해야 한다. 박정희 정권에서 의료보험을 도입하고, 김대중 정권에서 고용 유연화를 추진해 난국을 돌파했듯이 정권이 추구하는 이념에 반할지라도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실용적 정책 추진이 필요하다. 실용을 강조해 온 민주당의 과감한 결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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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 내과 전문의·호남대안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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