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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제천 화재참사, 여덟 번째 12월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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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한 일을 겪는다고 누구나 저항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닥쳐올 불이익을 계산하며 억울함을 삼키는 경우가 다반사다. 누구나 적당히 비겁하다는 걸 나는 꽤 뒤늦게서야, 어른이 된 후에 깨달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손해의 계산을 선순위에 두지 않았고, 그게 일반적이지 않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피멍이 들도록 교사가 학생을 패는 게 일상이었다. 언젠가 나는 머리에 ‘고속도로’를 내고 죽도록 학생을 패는 교사들을 제지하고 언쟁하며 그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이상한 애’라며 학교에서 고립되고 불이익과 비난이 닥쳐왔다. 무척 억울한 일이었지만, 나를 고립시킨 교사나 친우에 대한 원망은 크지 않았다. 고립된 상황에서 겁이 나 용기 내기를 주저하는 자신을 질책하며 몰아붙이는 데 마음의 대부분을 썼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당시엔 그 누구도, 나 자신마저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어른이 되고 과거보다 세상이 더 좋아졌대도, 온갖 비난과 부정의 시선에 포위된 채로 말하기를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12·21 제천 화재참사 유가족들도 그런 이들 중 하나다. 2017년 12월21일 제천시 하소동 복합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로 총 29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을 입었다. 건물 불법 증축 및 안전관리 소홀, 그리고 참사 현장에서 미흡한 소방 대응이 참사를 낳았다.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한 기억이 그 몸에 새겨진 유가족에게 손해를 계산하거나 비겁해질 겨를이 있었을까. 현장으로 달려가 참사의 과정을 직접 목격했던 유가족들은 진상과 책임의 규명을, 앞으로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을 사회가 되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건물주와 안전관리 및 대피에 책임이 있던 자들만 법적 처벌을 받았을 뿐, 정작 중징계받았던 소방지휘관들은 불기소 처분됐다.

유가족의 목소리는 법의 문턱을 넘지 못했고, 법적 구제의 길이 닫혀버렸다. 검찰은 경찰 수사 결과 기소 의견으로 송치된 사건을 수개월간 뭉개다 검찰수사심의위원회를 개최했다. 위원회는 사안의 충분한 검토 과정 없이 불기소 처분 권고를 냈다. 이후 건물 안전관리와 지방직 소방공무원 지휘에 책임이 있던 충청북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는 기각됐다. 소방 전문가들은 소방청과의 관계로 인해 유가족들의 자문 요청과 재판 출석을 거절했고, 말을 바꿔가며 책임 부인의 논리를 폈다.

참사 직후 사과 및 지원을 약속한 민주당 도지사는 말을 바꿔 어떠한 책임도 인정하지 않겠다며 보상금이 아닌 ‘위로금’을 지급할 테니 앞으로 이의제기 않겠다는 약속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작년에 발의된 참사 유가족 지원 조례안은 국민의힘이 다수당인 충북도의회가 부결시켰다. 양당 모두 유가족을 외면한 것이다. 언론과 지역사회는 마치 유가족이 참사 현장에 투입된 소방관 전원의 처벌을 요구하는 것처럼 호도하며 피해자 비난을 부추겼다. 이웃들은 보상에 관한 유언비어를 믿으며 비난에 동참했다. 그렇게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안타까운 희생자는 세 명이 늘었다.


비열하고 비겁한 사회가 부정과 망각으로 자신을 유지하려 한다. 불편한 참사의 기억을 지워버림으로써 그들은 앞으로도 이 사회가 그런 곳으로 남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결코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무엇보다 유가족이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유가족에게 종종 찾아오는 생생한 고통은 잊지 말아달라는 목소리 그 자체일 것이다. 그리고 진실규명이라는 말로 이 비겁한 사회를 질책하는 유가족의 외로운 목소리가 분명 누군가에게 닿아, 기억은 계속 퍼져나갈 것이므로.

곧 제천 화재참사 8주기가 온다. 제주항공 참사도 1주기를 맞는다. 이번 겨울은 안전하기를, 부디 외롭지 않기를 기도한다.

최성용 사회연구자

최성용 사회연구자

최성용 사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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