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환'. 성경 속 예수를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방탕한 생활 끝에 돌아온 아들을 용서하고 감싸안는 아버지의 자애로운 모습을 담고 있다. |
지난 주말, 대학도서관 서가를 거닐다 제목 때문에 발길이 멈춘 책이 있다. 예일대에서 출간된 성서학자 게리 앤더슨의 '죄의 역사'(2009)로 한국에선 2020년 번역된 책이다. 수천 년에 걸쳐 인간이 인간의 죄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성경 문구를 증거 삼아 추적하는 책이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초기 구약성서에선 인간의 죄는 짐으로 은유됐지만 후기 구약시대와 예수의 신약시대를 거치면서 죄는 갚아야 할 빚으로 여겨졌다.'
고대 히브리 성경에서 죄를 뜻하는 '짐'은 오염된 얼룩, 즉 '오점'의 비유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죄는 상환돼야 할 '빚', 즉 '채무'로 바뀌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예수가 가르친 주기도문의 유명 구절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의 헬라어 원문 뜻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준 것같이"라고 하니 오점에서 채무로 성격이 전환됐다는 것. 저자는 수백 개 구절을 시계열로 살피며 이를 증명해낸다.
성서학을 공부하지 않았으니 진위를 판별할 능력은 없지만 죄를 '오점 모델'과 '채무 모델'로 구분하는 안목에 무릎을 쳤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에 빠졌다. 현대사회는 인간의 죄를 오점 모델로 보는가, 혹은 채무 모델로 대하는가를.
타인의 용서든 신의 은총이든 얼룩으로서의 인간 오점은 갱생의 가능성을 품으며, 이때 당사자는 얼룩을 지우고 '다른 자아'로 환대받을 여지를 획득한다. 이게 오점 모델이다. 반면 채무 모델 속에서 죄를 바라보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갚을 수 있는 채무라면 상환 후 빚에서 해방되지만 상환이 불가능한 무한대 채무가 부과되면 불어난 이자도 무한대가 된다. 이런 채무는 도무지 갚을 길이 없다. 무한대의 빚더미, 도덕적 파산이 선고된 이들에게 요구되는 선택지는 하나, 죽음이었다.
감히 단언하기로,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죄는 오점 모델보다 채무 모델이 더 강화되고 있다. 현대의 규범과 공동체 의식 속에서 죄는 지속적이고 속죄엔 '완료'가 없다. 모든 순간이 기록되는 SNS에서 죄는 빠르게 확산하며 영구 박제된다. '다른 인간'이 될 조건인 용서는 그래서 자꾸만 불가능해진다. 채무액과 채권자 역시 무한대로 불어나서다.
채무 모델을 강화한 사회에서도 개인의 책임과 공동체(국가와 진영)의 그것은 비대칭적이다. 책임이 강조되면 공동체는 개인에겐 채무 상환을 요구하던 표정을 바꾸고 오점 모델을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그때는 다 그랬다" "다 지난 일이다"라는 말로 자기를 방어한다. 한 개인의 죄일지라도 그를 소속 공동체 일원인 '내 편'으로 대하면 채무 모델이 오점 모델로 둔갑하기도 한다.
물론 알고 있다. 오점 모델로써 자신의 과거를 정의 내리고 싶은 이들은 '과거'란 단어 뒤에 숨어 오점이 축소 해석되길 바랐다. 반대로 채무 모델을 적용하는 이들은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부과하고 상환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파멸에 이르게 했다. 그건 갚으라고 요구하는 빚이 아니고 무너지라고 명령하는 빚이었다. 책 '죄의 역사'는 오점과 채무의 두 렌즈 가운데 어느 방식으로 인간의 죄를 바라볼지를 묻는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1942)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한 알제리 국적 아랍인을 총으로 살해했다. 아득한 시간이 흘러 알제리 출신 작가 카멜 다우드는 이 소설을 패러디한 '뫼르소, 살인사건'(2013)을 썼다. 다우드는 뫼르소의 살인을 삭제 가능한 오점으로 보지 않고, 식민국가 프랑스가 알제리에 남긴 영원한 공동체적 채무로 재정의했다. 이 전복적인 시선으로 다우드는 공쿠르상을 받았다. 여기서 우리는 묻게 된다. 왜 죄는 개인에게 더 무거운 채무로 남고, 공동체 앞에선 얼룩처럼 쉽게 지워졌는가를.
[김유태 문화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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