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여진 맥스밸류 캐피털 최고경영자] 세계에 ‘딥시크(DeepSeek) 쇼크’를 안긴 이후 중국의 인공지능(AI) 기술은 경제 영역을 넘어 외교 언어로까지 확장하기 시작했다. 기술 혁신을 성장 도구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정당성과 체제 우월성, 나아가 국제질서 재편 의지를 설명하는 새로운 정치적 언어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술 외교란 기술력이 외교적 영향력과 결합해 국가의 행동 공간을 넓히는 구조를 뜻한다. AI 경쟁부터 미국의 고성능 반도체 수출 통제, 틱톡 강제매각 법안까지 최근 일련의 사건은 기술이 이미 지정학에서 최전선에 올라와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11월 열린 중국공산당 제20기 4차 전체회의(4중 전회)에서 중국이 ‘과학기술 자강’과 ‘핵심 기술 자립’을 국가전략의 중심축으로 올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는 “기술 주도권은 현대 국가 경쟁력의 기반이며 국가 안전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미국도 이를 산업정책이 아니라 전략적 위협으로 해석한다. 국제전략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은 이번 회의를 ‘중국이 기술 자립을 국가전략의 새 축으로 재배치한 분기점’으로 평가했다.
최여진 맥스밸류 캐피털 CEO. |
미국도 이를 산업정책이 아니라 전략적 위협으로 해석한다. 국제전략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은 이번 회의를 ‘중국이 기술 자립을 국가전략의 새 축으로 재배치한 분기점’으로 평가했다.
미국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는 중국의 기술 자립을 ‘미국 기술 리더십에 대한 가장 포괄적 도전이자 국제질서에 구조적 변화를 초래할 요소’라고 규정하며 기술 정책이 외교적 의도를 가진 신호체계로 작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중국의 기술 외교는 단일 분야가 아니라 다차원적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화웨이의 5세대 이동통신(5G) 인프라, 베이더우 위성항법, 디지털 실크로드 등은 기술 기반으로 영향력을 구조화하는 장치다.
또 기존의 물리적 인프라 중심 일대일로(중국의 서부 진출 외교 정책)에서 데이터·표준·통신 기술 중심의 ‘신(新) 일대일로’로 확장하는 흐름과도 맞닿았다. 특히 디지털 인프라 구축과 기술 표준 수출은 글로벌 사우스(남반구) 국가에 ‘중국식 발전 경로’라는 대안을 제시하며 신뢰를 확보하려는 전략적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중국의 행보는 여러 국가가 이미 활용한 기술 외교의 확장형으로 볼 수 있다. 인도는 ‘범아프리카 e네트워크’(Pan-African e-Network)로 아프리카 47개국에 원격교육·의료망을 구축했고 미국은 클린 네트워크와 반도체 공급망 동맹을 통해 기술을 동맹구조의 중심축으로 끌어올렸다. 다만 중국의 방식은 기술·정치·담론이 결합해 국가 이미지를 넘어 ‘중국식 질서’를 서사적으로 구성한다는 점에서 더욱 종합적이고 공격적이다.
한국은 세계적 기술력을 갖고 있음에도 이를 외교 전략으로 조직화한 경험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5세대 이동 통신(5G) 상용화, K방역, 바라카 원전 수출은 국제적 신뢰도 제고에 기여했으나 산업·보건·안보 영역에서 개별적으로 다뤄졌을 뿐 기술을 외교의 중심축으로 통합해 전략화하는 감각은 부족했다. 미국·중국에 안보와 경제를 의존하는 구조적 제약과 정부 부처 간 정책 사일로 등을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치열하게 진행하고 있는 미·중 경쟁 속에서 한국은 원전, AI 반도체, 수소 에너지, 디지털 정부 등 소중한 기술 자산을 외교 자산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전략적 행동반경을 크게 제한받게 된다.
특히 중국이 최근 강조하는 ‘강강연합’(제조업 강국 연합)은 우리가 가진 기술 역량 위에서 평가해야 할 문제이지 전략적 의존이라는 단순한 구도로 볼 수 없다. 반도체, AI 전환 기술, 수소·모빌리티 등 한국이 이미 우위를 가진 분야를 공고히 할 때 협력의 조건도 경쟁의 강도도 한국 스스로 설계할 수 있다. 기술 경쟁은 단순한 성능 경쟁이 아니다. ‘어떤 기술·데이터·규범이 세계 기준이 될 것인가’를 둘러싼 새로운 패권 경쟁이다. 한국이 필요한 것은 기술력 그 자체만이 아니라 기술과 외교가 결합하는 시대를 읽어내는 감각이다. 상대의 기술 전략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어야 우리의 외교적 자율성과 선택 공간이 넓어진다. 기술 역량을 강화하는 일은 결국 한국 외교가 능동성을 회복하는 가장 현실적인 출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