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대로 이창호는 난공불락이었다. 눌변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불필요한 말, 오해될 말, 확신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하면 입술을 뜯었다. 바둑이든, 인터뷰든 모래 구덩이에 몸을 묻고 상대가 걸려들거나 지레 포기하게 만드는 전법. 그 수에 말리지 않으려면 초집중해야 했다. 30분도 안 돼 돌을 던질 순 없었다.
◇ 조훈현이라는 巨人의 어깨
-1969승으로 최다승 기록을 세웠다.
“입단(11세)을 일찍 한 덕분이다.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 조훈현이라는 巨人의 어깨
-1969승으로 최다승 기록을 세웠다.
“입단(11세)을 일찍 한 덕분이다.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최다승 역시 스승 조훈현의 기록을 깬 거더라.
“…….”
-내년엔 2000승을 돌파할까?
“뭐, 그렇게 되지 않을까.”
-17세에 최연소 세계 챔피언으로 등극한 동양증권배(1992)가 가장 기억에 남을까?
“(조훈현) 선생님과 겨룬 최고위전(1990), 농심신라면배(2005)도 내겐 상징적인 대회다.”
-국가대항전인 농심배는 전패의 늪에 빠진 한국의 마지막 기사로 나서 5명의 중국·일본 고수를 연달아 물리치고 우승해 ‘상하이 대첩’으로 불린다. 중국 언론이 이백의 시를 인용해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니 천군만마가 소용이 없구나’라고 논평했던데.
“중국 팬들의 열기가 높았던 것은 기억 난다.”
-상하이 대첩에 에너지를 너무 쏟아 기량이 급락했다는 말도 있더라.
“이미 슬럼프였다. 당시 국내외 성적이 저조하니 팬들의 기대가 크지 않았고 그래서 오히려 부담없이 집중할 수 있었다.” 이창호는 자서전 ‘부득탐승’에 ‘좌중이 나의 승리에 비관적일 때 승부욕이 최고조에 이른다’고 썼다.
-동양증권배 결승 상대였던 린하이펑 9단을 존경한다고 했다.
“바둑을 대하는 구도자적 자세, 복기할 때의 겸양을 본받고 싶었다. 한참 어린 저에게 패배를 인정하고 허리 굽혀 인사하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가장 어려운 상대는 조훈현 국수였을까?
“내 약점이 초반 포석인데, 선생님의 초반 감각은 세계 제일이었다.”
-자서전에 ‘내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멀리 볼 수 있었던 건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썼더라.
“저를 제자로 받아주신 선생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눕고 싶을 때마다 다시 일어나 바둑판 앞에 앉았다.”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이 지난 11월 17일 경남 사천 항공우주과학관에서 열린 특별 대국에서 만난 모습. /연합뉴스 |
◇ 끝없이 노력하는 상대가 가장 두렵다
-최고 전성기땐 몇수 앞까지 내다봤나.
“경우의 수는 100수, 300수도 예측할 수 있지만 그건 의미가 없다. 결국 정확한 한수의 판단이 성패를 좌우한다.”
-‘나는 머리가 좋은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오래 생각할 뿐이다’라고 했더라. 천재는 아니란 뜻인가?
“그렇다고 해도 이상하고, 아니라고 해도 이상하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보다 끝없이 노력하는 상대가 더 두렵다’고도 했던데.
“재능이 있는데 노력까지 하는 사람을 어떻게 이기겠나.”
-실패의 원인을 찾는 노력을 가장 열심히 했다더라.
“패국을 복기하는 건 고통스럽지만 가장 큰 공부가 된다.”
-정미화(조훈현 아내)는 밤 늦도록 어린 창호의 바둑돌 놓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무수히 많은 기보와 책이 꽂혀 있던 선생님 서가는 보물창고였다. 다만 최근 기보와 연감 위주로 편중되게 본 것이 후회된다. 돌아간다면 수백년 고서까지 고루 읽을 것이다.”
-‘승리가 어른거리는 순간 실수하고 역전패 한다’는 교훈은 돌부처 이창호에게도 해당할까?
“꽤 많이…. 지는 것 자체는 괴롭지 않았다. 다 이겼다는 자만으로 돌을 경솔하게 놓는 바람에 패했을 때 가장 아팠다.”
-조훈현은 바둑에서 진짜 라이벌은 자기 자신이라고 했다.
“바둑은 상대의 실력보다 자신의 실수로 지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대마를 노리거나 큰집 차로 이기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 했던 것도 그래서인가?
“그렇다. 그런데 나이 들면서는 유혹에 잘 빠진다. 판단력이 흐려지고, 정확도도 떨어지고.”
-슬럼프에 빠지면 조치훈의 ‘휠체어 대국’을 떠올렸다던데.
“전치 12주의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휠체어 타고 바둑판 앞에 앉은 집념에 감동하지 않을 기사가 있을까.”
-조치훈은 ‘나는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고 했다.
“그분은 수에 대한 완벽주의자다. A는 아주 미세하게 좋고, B는 미세하게 나쁠 때 어떤 수를 둬도 결과는 비슷하지만 선생님은 그걸 가지고 1시간씩 장고했다. 최선에 대한 열정, 정신이다.”
2016년 3월 이세돌 9단(오른쪽)이 알파고와 대결하는 모습. 왼쪽은 알파고 대신 돌을 놓은 아자황 구글 딥마인드 연구원이다. /조선일보DB |
◇ 알파고 시대의 바둑
-이창호의 한국 랭킹은 현재 59위다.
“전투력도 강하고 끝내기도 잘하는 후배들이 많아졌다. 인공지능의 등장 이후 기사들 실력이 전체적으로 높아졌다.”
-그래도 역대 최고의 바둑기사로 불린다.
“불편하다.”
-신진서의 독주 시대라고 한다.
“신진서 사범이 뛰어나지만 그를 받쳐줄 기사들이 중국에 비해 두텁지 않아서 아쉽다.”
-2011년 무관(無冠)이 됐을 때 제자에게 모든 타이틀을 빼앗긴 조훈현의 심정을 절감했겠다.
“어느 분야나 영원한 승자는 없다.”
-‘이창호 키즈’인 이세돌에게 패했을 때 가장 아팠을까?
“그 전에도 이미 여러 기사들에게 졌기 때문에 특별히 누구와의 대국이 기억 난다고는 할 수 없다.”
-알파고에 인간 바둑이 무너졌을 때 무슨 생각을 했나?
“혼돈스러웠다. 사람이 기계와 달리기를 하면 지는 게 당연하다. 오만하게도 바둑은 그리 쉽게 잡히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우주처럼 바둑은 경우의 수가 무한대여서 인공지능이 따라잡기 힘들 거라고 봤다. 그게 깨진 것이다.”
-알파고가 계산력과 방어력이 탁월한 이창호 바둑을 닮았다고 한다.
“그건 제 기보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훈현) 선생님과 제가 우승을 많이 했으니 그 기보를 데이터 삼아 학습하지 않았을까.”
-최전성기 이창호라면 알파고를 이겼을까?
“그래도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은 인간과의 차이가 더 벌어졌다.”
-이세돌은 알파고에게 패한 뒤 바둑에 회의를 느끼다 은퇴했다. 왜 계속 바둑을 두나.
“그냥 둔다. ‘왜 바둑을 두냐’는 질문이 가장 어렵다.”
-알파고 이후 바둑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던데.
“인공지능이 등장했다고 해서 우주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바둑의 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알파고는 일종의 정답지라고 할 수 있는데, 정답지가 있다고 공부를 안 하는 건 아니지 않나.”
한국 바둑의 두 전설 조훈현과 이창호의 사제 대결을 그린 영화 '승부'. 이창호는 유아인이 연기한 자신의 모습을 재미있게 봤다고 했다. /조선일보DB |
◇ 승부사로 산다는 것
-영화 ‘승부’를 본 이세돌은 이창호 9단을 너무 ‘찌질하게’ 표현했다며 아쉬워하더라.
“영화엔 허구가 섞여 있고, 어차피 재미로 보는 거라 상관없다.”
-정미화 여사를 ‘작은 어머니’라고 불렀다던데.
“저 때문에 많이 난처하셨을 것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선 박보검이 이창호(최택)를 연기했다.
“택이에겐 동네 친구들이 많아서 부러웠다. 나는 시합 나가느라 학교를 제대로 못 다녔고, 프로 입단 동기는 저보다 7~8살 많은 분들이라 늘 혼자였다.”
-톱스타 박보검이 이창호를 연기해서 좋았을까.
“그때는 (박보검이) 무명이었다.”
-요즘은 신발끈을 잘 매시나?
“지금도 잘 못 맨다. 끈 달린 신발은 되도록 신지 않는다.”
-피 말리는 승부를 끝낸 날은 거의 실신하다시피 잠들었다던데.
“그랬던 것도 같고….”
-동생이자 매니저였던 영호씨는 ‘형은 세계 최고의 승부사이지만 저렇게까지 살아야 할까 싶을 만큼 안쓰러웠다’고 했더라.
“바둑을 좋아하니까…, 그래서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올해로 쉰, 지천명(知天命)이 된 이창호는 두 딸의 아빠다. 그는 "산에 들어가 피아노만 치고 싶다는 임윤찬이 나보다 훨씬 고수인 것 같다"며 웃었다. /장경식 기자 |
◇ 단 한번이라도 神의 한 수를
-돌부처라는 별명을 좋아하나?
“특별히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
-이창호란 사람을 잘 보여주는 별명인가?
“모르겠다.”
-어릴 땐 장난감 안 사주면 문구점 유리문으로 돌진하던 아이였다던데.
“개구쟁이였다는데, 어른들에 둘러싸인 바둑을 하면서 말수가 적어진 것 같다.”
-우승 인터뷰에선 매번 ‘운이 좋았다’고 하더라. 진심인가?
“100%는 아니지만, 비교적.”
-이세돌처럼 ‘질 자신이 없었다’고 하면 팬들이 좋아할텐데.
“…….”
-이세돌이 특이해 보이겠다.
“아니, 제가 더 특이해서….”
-인생 최초의 멘토는 할아버지라던데.
“바둑도 인생도 공짜가 없다는 걸 일깨워주신 분이다. 아버지는 제가 바둑 하는 걸 반대했는데 할아버지 유언으로 계속 할 수 있었다.”
-바둑을 안 했으면 뭘 하고 있을까?
“그냥 평범한 사람.”
-책 읽는 걸 좋아한다고.
“어릴 때 바둑만 두느라 너무 못 읽어서. 근데 책 읽는 속도가 느리다. 다른 사람의 5분의1 정도.”
-대학엔 가지 않았다.
“입학하라는 학교가 있었지만 공부를 안 하면서 학벌만 따는 건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이창호는 왜 제자를 키우지 않나.
“바둑 두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
-올해 쉰, 지천명(知天命)이다. 이창호의 기풍처럼 인생도 느린 것이 빠른 것을 이길 수 있을까?
“선생님의 빠르고 화려한 기풍을 동경했지만 내겐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느리지만 두텁게 방어하며 버티는 길을 찾아낸 것이다. 인생에도 여러 개의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초스피드가 경쟁력인 시대인데.
“일본의 명인 오청원 선생은 ‘바둑은 조화’라고 했다. 균형을 다투는 싸움. 인생도 조화라고 생각한다. 너무 빨라서 놓치고 실수하는 게 얼마나 많은가.”
-이창호에게 바둑이란.
“먼 길을 가는 것.”
-아직도 갈 길이 남아 있나?
“단 한번이라도 나무랄 데 없는 바둑을 두고 싶다.”
-임윤찬이란 연주자는 산에 들어가 피아노만 치며 살고 싶다고 했는데.
“딸이 좋아한다. 나보다 그 친구가 훨씬 고수인 것 같다(비로소 웃음).”
‘대국’은 1시간 40분만에 끝났다. 중구난방 던진 하수(下手)의 돌을 천하의 국수(國手)가 인내하며 받아준 형국이었다.
☞이창호
1975년 전북 전주 출생. 충암고를 졸업했다. 11세이던 1986년 프로 기사로 입단, 1988년 KBS 바둑왕전에서 최연소 타이틀을 따냈다. 1990년 최고위전에서 스승 조훈현을 이기는 파란을 일으켰고, 1992년 동양증권배 우승으로 최연소 세계 챔피언 기록을 세웠다. 메이저 세계대회 역대 최다승(17회) 기록도 갖고 있다.
[김윤덕 선임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늘의 운세] 12월 15일 월요일 (음력 10월 26일 戊午)](/_next/image?url=https%3A%2F%2Fstatic.news.zumst.com%2Fimages%2F25%2F2025%2F12%2F14%2F59da93780c924b2ea5966949f34a9ba8.gif&w=384&q=75)
![관절이 부드러워지는 초간단 운동법 [닥터 인사이드]](/_next/image?url=https%3A%2F%2Fstatic.news.zumst.com%2Fimages%2F25%2F2025%2F12%2F13%2F3eb2081c5e71461b979b756137f0c67c.jpg&w=384&q=7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