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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한국은행의 연명치료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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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이 최근 ‘연명치료’와 관련한 실증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데이터로 사회문제를 들여다보고 공론장을 넓히는 시도 자체는 반갑다. 중앙은행이 경제통계의 보고(寶庫)인 만큼, 사회정책의 맹점을 실증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은 분명 의미가 있다. 다만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떠올리면, 그 발표가 어쩐지 ‘타이밍’을 잃은 듯해 씁쓸함이 남는다.

지난 4년 가까이 이어진 한국은행 통화정책의 성과를 이제는 냉정하게 되짚어볼 시점이다. 물가는 정점에서 내려와 안정 국면에 들어섰고, 기대 인플레이션도 2%로 수렴하는 흐름을 보인다. 표면적으로는 ‘안정’의 성과가 보이지만, 그 과정에서 치른 대가가 작지 않았다. 성장률은 좀처럼 힘을 받지 못했고, 무엇보다 가계부채의 구조조정은 구호에 비해 거의 진척되지 않았다.

가계부채를 ‘한국 경제의 시한폭탄’이라고 수차례 경고하면서도, 정작 통화정책의 방향과 신호는 분명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금리를 인상해야 할 시점에는 ‘혼합 정책(policy mix)’을 내세우며 결정을 주저했고, 그사이 한·미 금리 격차는 역전되거나 큰 폭으로 벌어진 기간이 길어졌다. 가계부채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중이 낮아졌다는 주장 역시 섣부른 안도감을 줄 뿐이다. 분모인 GDP가 재추계되면서 비율이 내려간 측면이 크고, 절대 규모의 조정이 뚜렷하게 확인되기는 어렵다. 오히려 정치 국면에 맞춰 정책자금이 풀리면서 부채 총량이 쉽게 줄지 않았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정책 거버넌스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법 조항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이 믿을 수 있는 재정정책과의 ‘거리 두기’에 달려 있다. 정치는 확장적인 통화정책이라는 유혹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확보해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왔다. 한국은행이 독립적으로 판단하기보다 대통령과 기획재정부의 눈치를 본다는 비판까지 제기됐다.

그런데 최근 몇년, “F4”라는 이름하에 재정당국과 중앙은행이 거의 한 몸처럼 보인 순간이 잦았다. 회의가 잦아지는 것 자체도 문제이지만, 그 과정에서 통화정책의 독립성이 훼손되고 있다면 더 큰 문제다. 현 총재가 물러나고 장악력이 강한 부총리가 온다면, 한국은행이 기재부 남대문 출장소로 돌아가는 것은 순간일 수 있다.

최근 화폐량(M2)이 빠르게 팽창하는 흐름도 불안요인이다. 유동성이 늘면서 가장 먼저 반응하는 곳은 서울 아파트 같은 자산시장이다. 여기에 기업들의 달러 보유와 해외 파킹, 대외 불확실성, 개인의 해외투자 확대, 금융상품 통계 분류 변화 등 여러 요인이 얽히며 원화 가치의 흔들림을 키운다. 그러면서 환율이 불안해지고 있다.


한국은행은 환율과 자산시장 불안을 두고 연기금, 서학개미, M2 통계 정의 등을 거론했다. 맞는 지적도 있다. 다만 책임의 화살이 밖으로만 향할수록, 중앙은행의 핵심 임무에 대한 질문은 더 커진다. 통화정책은 결과로 평가받는다. 프레임을 바꾼다고 해서 중앙은행의 책임을 다른 곳으로 전가할 수는 없다. 원인은 수만 가지일 수 있다. 그러나 정책평가에서 제일 먼저 따져야 할 질문은 하나다. 금리라는 가장 강력한 레버가 적시에, 일관된 방향으로 작동했는가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이창용 총재의 해외 인터뷰 발언은, 의도와 달리 ‘입이 재앙이 된’ 사례로 남을 만하다. 금리정책에서 어느 정도의 선택지를 열어두는 것 자체는 가능하지만, 그것을 해외 언론을 통해 먼저 던지는 순간 시장은 정책의 실체보다 발언의 뉘앙스에 과잉 반응한다. 특히 ‘방향 전환’ 같은 표현은 가장 민감한 신호로 해석되기 마련이라, 투자자들은 불확실성을 가격에 즉시 반영하고 국채금리는 흔들린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시장이 흔들리자 한국은행이 뒤늦게 해명에 나서는 모습까지 겹치며, 커뮤니케이션이 변동성을 키운 모양새가 됐다. 중앙은행에 예측 가능성은 그 자체로 정책수단인데, 메시지가 일관되지 않거나 전달 경로가 어색하면 정책 신뢰가 깎인다.

본업을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연명치료 연구가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의료·교육·농산물 수입 같은 영역을 데이터로 들여다보는 일은 가치 있다. 하지만 그런 연구가 ‘재미로 한번 분석해본 것’처럼 보이면, 사회는 진정성을 묻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잘 모르는 분야의 하나의 흥미로운 보고서가 아니라, 금리정책이 남긴 상처를 솔직히 인정하고 다음 사이클에서 무엇을 바꿀지 명확히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사회정책 연구도 더 설득력을 얻는다. 중앙은행이 본업에 집중할 때, 시장의 기대도 다시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우석진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교수

우석진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교수

우석진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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