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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과 세상]무한 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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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엔
나보다 스무 살쯤 어린 스님에게
살면서 놀라지 말라는 말을 들었고

화요일엔 백일홍을 심었다
수요일엔 내가 말린 견과류 같다는 생각을 했고
목요일엔 비밀을 누설했다
금요일엔 칠 층 병실에서 창문처럼 흔들렸고
토요일엔 딴생각을 하다 봄이 왔다
일요일엔 정물화처럼 앉아 밤을 샜다
그러므로 오늘은 다시 월요일

이 그저 그런 날들이 다 어디서 온 건지

나는 푸른빛으로 이 무한 루프 속을 행진한다

허연(1966~)

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우리는 끝없이 반복되는 삶의 궤도를 돌고 있다. 시인은 월요일에 자신보다 스무 살 정도나 어린 스님에게서 “살면서 놀라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월요일에 듣기에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말이다. 화요일에는 “백일홍을 심었”고, 목요일에는 “비밀을 누설했”고, 일요일에는 “정물화처럼 앉아 밤을 샜”다. 다시 돌아오는 요일에는 무슨 일들이 일어날까. 이 시를 읽으면서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스허르의 판화 작품 ‘뫼비우스의 띠 Ⅱ’가 떠올랐다. 뫼비우스의 띠 위를 끝없이 걸어가는 개미들처럼, 무한 반복되는 삶이란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 우리도 그 개미들처럼 어쩔 수 없이 끝없는 궤도를 돌고 도는 존재다. 그러나 매일 똑같은 날은 단 하루도 없다. 단 1초도 각자에게 특별하고 다르다. 시인은 “그저 그런 날들”조차 “다 어디서 온” 것인지 질문한다. 시인처럼 “푸른빛”으로 무한 루프 속을 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검은빛으로 달리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그 빛들을 선택하며 달릴 수 있는 것일까. 오늘은 다시 월요일, 또 얼마나 놀랄 일들이 일어날까.

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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