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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전쟁이 불씨 지핀 ‘유럽 징병제’ 논의… 청년층 거센 반발[글로벌 포커스]

동아일보 이기욱 기자,이지윤 기자,안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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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징병제 부활 논란

2011년 징병제 폐지한 독일에서 유사시 징집 가능한 법안 통과돼

프랑스, 징병제 재도입 논의 착수… ‘준징병제’ 자발적 군복무제 도입

우크라와 국경 맞닿은 폴란드는 전국민 대상 군사훈련 프로그램

등교 거부 등 청년층 반발 심화… 심각한 유럽 재정난도 ‘걸림돌’
《안보 불안이 부른 유럽 ‘징병제 부활’

한동안 징병제를 폐지했던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의 침공 우려와 국방력을 강화하라는 미국의 압박으로 징병제를 부활시켰거나, 재도입하는 것을 논의 중이다. 징병제를 둘러싼 유럽 주요국의 움직임과 갈등을 짚어봤다.》




“독일군을 유럽 최강 군대로 만들겠다.”(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모든 유럽 동맹국이 위협에 맞서 진전을 이루는 지금, 프랑스가 가만히 있을 순 없다.”(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안보 위기가 커진 유럽 각국에선 징병제 부활 등 군복무제 개편 움직임이 활발하다. 특히 최근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외교로 “미국이 유럽을 돕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 것도 한몫하고 있다. 이른바 ‘유럽 자강론’이 확산되면서 국방비 부담을 늘리는 한편 병력 자원 확보를 위한 징병제 도입을 다시 검토하고 있는 것.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냉전 시기의 유물이 부활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유럽뿐 아니라 최근 전쟁을 겪은 이스라엘, 중국의 침공 위협에 직면한 대만도 군복무제 강화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젊은층을 중심으로 징병제 반대 여론이 일고 있고, 유럽 각국의 재정 상황이 열악해 실행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유럽 각국의 징병제 관련 동향과 실현 가능성 등을 살펴봤다.

● ‘영세 중립국’ 스위스도 징병제 확대 논의

올 9월 독일 뒤셀도르프에 있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회에서 독일군 신병들이 선서식에 참가하기 위해 행진하고 있다. 뒤셀도르프=AP 뉴시스

올 9월 독일 뒤셀도르프에 있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회에서 독일군 신병들이 선서식에 참가하기 위해 행진하고 있다. 뒤셀도르프=AP 뉴시스


2011년 징병제를 폐지한 독일 연방의회는 5일 군복무제 도입안을 가결했다. 찬성 323표, 반대 272표로 의회를 통과한 병역법 개정안에 따라 2008년 1월 1일 이후 출생한 모든 남성은 18세가 되면 의무적으로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 독일 정부는 자원 입대를 유도하되, 목표 병력을 채우지 못하거나 안보 비상 상황이 생기면 ‘필요 기반 징집’을 시행키로 했다. 독일 안팎에서 새로운 군복무제를 ‘잠재적 의무복무제’로 보는 이유다.

독일 정부는 18만3000명의 현 병력 수준을 2035년까지 26만 명으로 늘리고, 예비군 20만 명을 추가로 확보하는 목표를 세웠다. 10대 청소년들은 국가가 자신들을 전장으로 내몰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4일 발표된 독일 통합이주연구센터(DeZIM) 설문조사에 따르면 18∼28세 청년층에서 입대 의향이 있다고 밝힌 응답자는 14%에 불과했다.


서유럽 최대 군사강국인 프랑스는 내년부터 자발적 군복무제를 시행한다. 프랑스는 2000년 징병제를 폐지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징병제 재도입 논의에 착수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위험을 피하는 길은 오직 대비뿐”이라며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보편적 국가 복무(SNU)’ 계획을 지난달 27일 발표했다.

이에 따라 내년 여름부터 18, 19세 청년을 중심으로 10개월간 유급 군사훈련이 시행될 예정이다. 지원자는 월 최소 800유로(약 118만 원)의 급여를 받으며, 수료 후 직업 군인으로 지원하거나 예비군에 편입된다. 내년 3000명을 시작으로 2035년 5만 명까지 훈련 참가자 규모를 계속 늘릴 계획이다. 프랑스 정부는 이 제도를 활용해 향후 10년간 총 5만 명의 병력을 확충할 방침이다. 현재 프랑스는 현역 20만 명, 예비군 4만7000명 등 약 25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 러시아에 대한 안보 위협이 특히 큰 폴란드는 지난달 22일 전국민 대상의 군사훈련 프로그램인 ‘준비태세’ 시범 운영에 들어갔다.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현재 예비군을 포함해 20만 명 규모인 군 병력을 향후 50만 명까지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폴란드는 민간인 군사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2027년까지 민간인 10만 명을 전시 자원봉사 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참여자는 3주간 주말을 활용해 기초훈련, 생존훈련, 응급처치 훈련, 허위정보 판독 훈련 등을 받게 된다. 폴란드 국방부는 “2주 만에 민간인 1만8000명이 지원해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었다”며 지원자의 45%가 여성이라고 했다.

크로아티아도 내년 징병제 부활을 확정했다. 19∼29세 남성을 대상으로 2개월의 기초 군사훈련을 의무화해 예비 전력을 확보할 계획이다.

이미 징병제를 운영 중인 유럽 국가들은 관련 제도 강화에 나서고 있다. 징병제를 실시하는 9개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 중 덴마크는 당초 2027년으로 계획한 여성 의무 복무 도입 시기를 2년 앞당겼다. 이에 따라 올 7월부터 만 18세가 되는 여성에게 소집 통지서가 발송되고 있다. 내년부터 시작되는 징병 검사에선 여성도 남성처럼 추첨번호를 뽑아야 하고, 지원자가 부족할 경우 강제 징집될 수 있다.


덴마크는 의무복무 기간도 4개월에서 11개월로 늘릴 계획이다. 트로엘스 룬 포울센 덴마크 국방장관은 “현 안보 상황을 고려할 때 군은 더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한다”며 “성별과 관계없이 가장 유능하고 의욕적인 덴마크 청년들을 모으겠다”고 밝혔다.

유럽 내 안보 지형이 급변하면서 대표적인 중립국인 스위스도 지난달 여성의 군 복무를 의무화하는 안건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현재 스위스는 징병 대상 연령 남성들의 병역이나 민방위대 참여가 의무화돼 매년 3만5000여 명의 남성이 의무복무하고 있다. 여성 병역 안건은 반대율 78%로 부결됐지만, AP통신은 “유럽 내 안보 위기가 커지는 상황에서 중립국인 스위스에서조차 병역 확대 방안이 논의됐다”고 진단했다. 이 외에도 스위스는 지난해 군 예산을 2030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의 1% 수준까지 조기 증액하는 등 국방력 강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 독일 ‘등교 거부’ 운동 등 징병제 반발 움직임


유럽 각국의 징병제 도입 움직임에 젊은층들 사이에선 반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독일에선 최근 베를린, 쾰른 등 약 90개 도시에서 청소년들이 등교 거부 운동을 벌였다. 특히 내년에 18세가 돼 징병검사 대상이 되는 2008년 이후 출생 청소년들이 시위를 주도했다. 이들은 시위 현장에서 “우리는 총알받이가 되고 싶지 않다” “삶에서 반년을 막사에 갇혀 제식과 복종을 훈련받고 살해 기술을 배우며 보내고 싶지 않다”는 등의 구호를 내걸었다.

징병제에 반대하는 독일 청년들의 명분은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박탈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등교 거부 운동을 조직하고 있는 단체 ‘징병제에 반대하는 학생 파업’은 “독일 기본법(헌법) 4조 3항은 ‘무기를 드는 군 복무를 누구도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며 “우리가 어떻게 삶을 꾸려 갈지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자강 노력이 전쟁 해결을 위한 방법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온다.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시위에 참석한 한 고교생은 “왜 전쟁을 무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느냐”며 “그것은 제1, 2차 세계대전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뿐이다”라고 폴리티코 유럽판에 전했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배우길 원치 않는다”며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에게 진단을 받는 등 징집을 피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대해 독일 정부는 당면한 안보 위기를 직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독일 국방장관은 “누구든 시위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는 우리 민주주의의 가장 큰 성취 중 하나다”라면서도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살고 싶다면 그것을 위해 나서서 지킬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 맞서 국민 스스로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

프랑스에선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에서 국방 예산을 67억 유로(약 11조4600억 원) 늘리겠다고 발표하자, 파리에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시위가 벌어졌다. 이들은 정부가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지출 감소를 목표로 한다면서도 국방 부문에서만 예산을 늘리는 건 문제라는 입장이다. 이들은 시위 현장에서 “우리 연금을 위한 파업” “사회 및 재정적 정의를 위하여”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 유럽 재정 적자도 징병제 도입에 걸림돌


지난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알프스 지역의 바르스 군사기지를 방문해 군인과 육군고등학교 학생들 앞을 걷고 있다. 바르스=AP 뉴시스

지난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알프스 지역의 바르스 군사기지를 방문해 군인과 육군고등학교 학생들 앞을 걷고 있다. 바르스=AP 뉴시스


유럽 각국의 부족한 재정 여력도 징병제 도입 등 국방비 증액에 걸림돌로 지목된다. 유럽연합(EU)의 재정준칙에 따르면 회원국들은 정부 부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60% 이하로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EU에 따르면 징병제 도입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프랑스와 독일은 올 1분기 기준 GDP 대비 정부 부채가 각각 114.1%, 62.3%에 이른다. 폴란드(57.4%), 크로아티아(58.4%) 등은 간신히 기준을 넘지 않은 상황.

한참 일할 나이의 청년들을 군대에 모아놓으면 경제 성장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독일 재무부는 연구 보고서에서 징병제 시행 시 국민총소득(GNI)이 0.4%(약 30조 원) 감소할 거라고 전망했다. 독일 재무부는 “징병제보다는 독일군에 더 많은 재원을 투자해 독일군을 매력적인 고용주로 만드는 게 훨씬 합리적”이라고 지적했다. 군인의 처우를 향상하는 등의 방식이 경제적으로 더 효율적이라는 얘기다. 프랑스 정부 산하 자문기관인 고등전략계획청도 6개월간 7만 명의 군인을 훈련시키는 데 연간 17억 유로(약 3조 원)가 들어간다고 추산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징병은 시민들을 자신들의 기술과 재능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닌 일자리로 내모는 제도”라며 “경제 성장은 둔화되고 있고, 세계 무역질서가 뒤흔들리면서 유럽 경제는 막대한 압박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이지윤 기자 asap@donga.com
안규영 기자 kyu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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