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의 명재고택은 유학자의 집이다. 명재 윤증(尹拯)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이다. 율곡의 학통을 계승하면서 가학(家學)을 통해 소론계 학통을 수립하였다. 명재 윤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소론계 학통은 조광조(趙光祖)-성수침(成守琛)-성혼(成渾)-윤황(尹煌)-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으로 이어졌다.
윤증의 초상화 |
명재고택이 자리한 곳은 니산(尼山)이다. 니산은 중국 산둥성(山東省)에 있는 산으로 공자의 고향이다. 본래 명칭은 니추산(尼丘山)인데 공자의 부모가 이곳에서 기도를 한 후 공자를 얻었다고 하여 공자의 이름을 ‘구(丘)’, 자를 ‘중니(仲尼)’라고 하였고, 후손들은 이 산을 ‘니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명재고택이 자리한 노성은 공자의 고향을 닮은 명당이다. 중국 니산에서 공자가 태어났듯이 이곳에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유학자들이 대를 이어 배출되었다.
꼿꼿한 선비정신과 자존심
명재고택 전경(봄, 여름, 가을) |
명재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파평윤씨 노종파의 성리학은 노론 송시열의 학통과는 달리 실용을 강조하는 무실(務實)과 실심(實心)의 성리학이다. 윤증은 예학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명재고택의 제사상은 소박하다. 윤증은 제사는 엄정하되 간소하게 하라고 가르쳤다. 구체적으로 제사상에 낭비가 심한 떡을 올리지 말며, 일거리가 지나친 유밀과와 기름이 들어간 전도 올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특히 생고기를 쓰는 것은 음복을 할 때 나누어 주어 각자 자신의 입맛에 맞도록 요리해 먹으라는 실용주의적인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음식을 장만하고 제사를 모시는 자세는 매우 엄격하였다. 제삿날 3일 전부터는 고기를 먹지 않으며 나쁜 말을 삼가고 크게 떠들고 웃지도 않았다. 경건한 마음으로 조상을 모셔야 하기 때문이다. 음식을 만들 때는 말을 하게 되면 침이 튀어 나갈 것을 염려하여 입에 창호지를 물고 음식을 준비하고 제사상을 차렸다. 사대부 가문 가운데 이렇게 소박하지만 엄격하게 제사상을 준비하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수백 년의 세월을 넘어 전통을 지켜온 꼿꼿한 선비정신과 당당한 자존심은 곧 이 집안의 품격이다.
명재고택의 겨울풍경 |
실용과 과학의 상징
유학자의 집은 단아하고 소박하다. 불교를 바탕으로 하는 고려시대의 문화가 화려하고 장엄하다면 유학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시대의 문화는 소박하고 단아하면서도 단순하다. 조선시대 건축도 유학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다. 명재고택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집으로 매우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다. 명재고택에는 실용과 과학의 상징들이 숨어 있다. 집안 곳곳에 과학적인 원리와 아녀자에 대한 배려 등 기술적으로 철저하게 논리적인 측면이 돋보인다.첫째, 명재고택은 바람을 가장 과학적으로 이용하였다. 명재고택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바람길이 있다. 안채와 곳간채 사이의 바람길이 그것이다. 두 건물을 평행으로 배치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삐뚤어지게 하였다. 건물을 삐딱하게 놓은 것은 바람길의 양쪽 간격을 다르게하기 위함이다. 남쪽은 넓고 북쪽은 좁다. 이렇게 하면 넓은 남쪽 길에서 들어온 바람이 좁은 북쪽 길로 빠져나갈 때 바람의 속도가 빨라져서 더 시원한 바람이 불고, 반대로 북쪽에서 들어온 바람은 남쪽으로 빠져나가면서 속도가 느려지고 순해지기 때문이다. 명재고택에 있는 바람길은 바로 ‘베르누이의 정리’라는 과학적 논리를 이용하였다. 여름에 불어오는 남동풍을 북쪽에서 시원하게 만들고, 겨울에 부는 차가운 북풍은 남쪽에서 순하게 만들어주는 구조이다.
사랑채 내부 |
둘째, 명재고택에서 실용의 상징은 사랑채에 있는 문과 창문이다. 사랑방에서 북쪽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미닫이와 여닫이를 합한 문이다. 여닫이는 전체를 열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안팎으로 문을 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반면 미닫이는 문 안팎으로 문을 열 수 있는 공간은 필요 없지만 문 전체를 열 수 없는 단점이 있다. 명재고택 사랑채의 문은 미닫이문 끝의 문짝에 돌쩌귀를 달아서 여닫이문으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미닫이와 여닫이를 합해서 미닫이와 여닫이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최대한 살린 것이다.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미닫이와 여닫이를 합한 문은 실용성을 강조한 윤증 가문의 가풍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사랑채의 누마루의 창문 비율은 16:9이다. 이 비율의 가장 큰 장점은 풍경을 감상할 때 편안하다는 것이다. 사람의 눈은 상하보다 좌우로 넓게 볼 때 더 생생한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HD급 디지털 방송에서 TV 화면 비율이 16:9로 바뀐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누마루에 앉아 바깥 경치를 감상하는 데 가장 적절한 비율이 16:9라는 사실을 300여 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채 대청에서 본 풍경 |
셋째, 명재고택에는 솟을 대문이나 울타리가 없다. 주변을 둘러싼 나무와 숲이 이를 대신한다. 자연을 이용한 가장 환경 친화적인 건축이다. 명재고택은 니산을 주봉으로 하고, 바로 20m 앞에 안산이 있다. 산이라고 불리기는 쑥스러울 정도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윤증은 안산 위에 소나무를 심어 보완하면서 그 사이에 행랑채와 솟을 대문을 건축하거나 담장을 하지 않았다. 이처럼 당당한 고택은 노론이 정국을 주도할 당시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의 한 점 부끄럼 없이 모든 것을 다 보여 주겠다는 자신감과 자존심의 상징이다.
사랑채 기단 일영표준 |
넷째, 사랑채 주춧돌에 새겨진 일영표준(日影標準)이라는 표지석이다. 이는 윤증의 9대손인 윤하중(尹昰重)이 해시계의 영점을 잡아 천체를 관측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윤하중은 개화기 때 인물로 천문학에 밝았다. 그는 1910년 24시간제 해시계를 독자 개발하고 천문학 관련 저서인 <성력정수(星曆正數)>를 한문으로 편찬하여 당시의 시각 기준이 잘못되어 있음을 밝혔다. 또한 당시 해시계의 영점을 놓고 천체를 살필 수 있는 위치를 정하고 이곳에 ‘일영표준(日影標準)’이라는 글을 댓돌에 새겼다. 지금도 고택 사랑채를 오르는 돌계단 윗부분에 네모난 댓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가문의 실용적인 학풍으로 인하여 명재고택에서는 윤하중 때부터 음력 대신 양력을 사용하고 제사 역시 모두 양력으로 지내고 있다.
무릉도원에 사는 사람의 집
사랑채의 도원인가 현판 |
명재고택에는 풍류와 운치가 있다. 윤증이 실학과 실용의 정신을 실천한다고 하여 경직된 실심실학(實心實學)의 정신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택 곳곳에는 풍류와 운치가 살아 있다. 사랑채에 있는 ‘도원인가(桃園人家)’라는 현판과 ‘허한고와(虛閒高臥)’라고 쓴 편액이 그것이다. 도원인가는 ‘무릉도원에 사는 사람의 집’이라는 뜻이다. 무릉도원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선경(仙境)이다. 이상향을 꿈꾸었던 도연명은 전란과 극심한 정치적 혼란이 되풀이되던 시대에 자신의 소신과 생활 방식을 굳게 지키기 위해 세속을 떠나 은거하였다. 그리고 별천지인 무릉도원을 꿈꾸었다. 병자호란과 당쟁이라는 정치적 혼돈기에 살았던 윤증은 도연명처럼 무릉도원과 같은 이상향을 그리워하였다. ‘도원인가’ 현판의 글씨를 자세히 살펴보면 ‘도(桃)’ 글자의 나무 목(木)이 위로 올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곳이 하늘에 있는 신선 세계임을 상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글자 색깔 또한 하늘의 색인 옥색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도화원기’의 내용을 보면 한 어부가 물고기를 잡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물 위로 떠내려오는 향기로운 복숭아 꽃잎 향기에 취해 꽃잎을 따라가다 신세계를 발견한다. 그런데 그곳은 어른 한 명이 간신히 통과할 정도의 작은 동굴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고택 사랑채 누마루의 전퇴 쪽문이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크기인 것은 이 같은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한편 사랑채 기단은 2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부 기단은 이상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구름을 형상화하여 부드러운 곡선 기단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상부 기단에는 반원형의 못을 파고 30~50㎝ 정도 크기의 크고 작은 괴석으로 석가산을 조성해 놓았다. 반원형의 못은 하늘을 상징하고 기암괴석으로 가득 찬 것이 마치 일만이천봉으로 이루어진 금강산처럼 보인다. 그리고 거기서 더 아래쪽 정원에는 열두 개의 돌로 중국의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만들었다. 무산십이봉은 중국 사천성에 실재하는 산으로 빼어난 경치와 그곳에 선녀가 살고 있다는 전설 때문에 시인 묵객들의 이상향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도 보통 연못의 섬이나, 중정(中庭)의 첨경물(添景物)로 사용하는 석가산(石假山)에서 이 형태를 모방하였다.
사랑채 기단의 석가산 |
사랑채에서 방문을 열면 바로 밑에는 인공으로 조성한 금강산과 무산십이봉이 보이고, 멀리 동쪽으로 계룡산의 암봉(巖峰)들이 눈에 들어온다. 금강산과 무산십이봉은 가산(假山)이요, 계룡산은 진산(眞山)의 경치이다. 사랑채에 앉아서 3대 명산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도록 주변의 정원을 조성한 것이다. 현실에서는 예제를 실천하는 예학자로서의 모습이지만, 윤증 선생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무릉도원의 이상세계를 그리워했던 것 같다. 사랑채 대청마루에 걸려 있는 편액 ‘허한고와(虛閒高臥)’는 ‘모든 것을 비우고 한가로이 누워 하늘을 본다’는 의미이다. 마음을 텅 비우고 한가함을 즐기며 고상하게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이 아닐까? 무릉도원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이상향이리라.
차장섭 강원대학교 교양학부 명예교수
경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조선사연구회 회장, 강원대 도서관장, 기획실장, 강원전통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강원대 자유전공학부 명예교수로 한국사, 미술사 등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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