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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의 종도 날마다 소리를 가다듬는다 [진옥섭 풍류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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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는 원래 천축의 악기인데, 실크로드와 중국을 거쳐 이 땅에 도달했다. 타클라마칸과 돈황을 지나며 달빛에 스러진 문명의 길이 감겨들었으리라. 장구의 길이 천축을 다녀온 혜초의 길과 같다. 그래선지 유랑하는 사당패와 함께 떠돌았다. 이 역사가 용구루에서 장구를 울리는 연유이기도 했다.



지난달 29일 ‘산중문답’, 용흥사에서의 동종과 협연하는 ‘명금’과 동종의 보살상을 옮겨 그리는 ‘명선’을 펼쳤다. 왼쪽부터 고연세(승무), 이지형(시조), 우지민(민요), 이채원(불화장), 김운태(채상소고춤), 덕유스님(용흥사 주지), 진옥섭(연출), 이희원(북), 서자영(장구), 유가비(징), 장보미(상쇠). 담양군문화재단 제공

지난달 29일 ‘산중문답’, 용흥사에서의 동종과 협연하는 ‘명금’과 동종의 보살상을 옮겨 그리는 ‘명선’을 펼쳤다. 왼쪽부터 고연세(승무), 이지형(시조), 우지민(민요), 이채원(불화장), 김운태(채상소고춤), 덕유스님(용흥사 주지), 진옥섭(연출), 이희원(북), 서자영(장구), 유가비(징), 장보미(상쇠). 담양군문화재단 제공


산사의 종도 날마다 가다듬어야 제소리를 내는가 보다. “떵”하니 망치로 치니, 가슴팍을 비워 ‘떠덩’ 받아 올리는 울림통이 되고 싶은 소리다. “땡”하니 북채로 치니, 마치 코감기로 맹맹해 창문을 열었을 때처럼, 찬바람이 비강 속으로 서서히 파고들어 마침내 뚫리는 소리다. 용흥사의 동종, 그렇게 380년 넘게 성음을 갈고 닦는 중이었다.



‘어찌 푸른 산에 사느냐기에,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에서 ‘물을 문’(問)을 ‘들을 문’(聞)으로 바꾸어 ‘산중문답’(山中聞答)이라 이름했다. 1644년에 제작된 국가유산 보물 1555호 용흥사 동종의 소리를 듣고자 했다. 지난달 29일, 전남 담양 용흥사와 담양군문화재단 공동 주최로, 동종과 전통악기가 협연하는 ‘명금’(鳴金: 쇠를 울림)과 동종에 새겨진 보살상을 옮겨 그리는 ‘명선’(明線: 선을 밝힘)으로 구성했다.



대웅전에서 덕유스님(용흥사 주지)이 일어섰다. 풍채가 웅장해 속세에 있다면 조폭들의 드잡이도 저지할 만했다. 좌중을 눈감게 하고 시간여행을 시작했다. 용흥사가 만들어지고, 380년 전 동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상케 했다. 장인의 수공과 사람들의 기원을 생각게 하고, 이 종소리를 듣고 영조가 탄생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용흥사 동종의 눈에 띄는 특징은 종을 매다는 고리다. 대개는 용이 한두마리인데, 유일하게 네마리의 용으로 만들어졌다. 전설에 의하면, 예전 이 절의 스님이, 한 소녀가 이곳에 와 산신령의 인도로 고관대작을 만나 입궐하여 성군을 낳을 것을 예견해서, 네마리 용으로 종의 고리를 만들었다 한다. 50년 후 숙빈 최씨가 이 절에서 기도한 뒤 영조를 낳았으니, 전설이 현실이 되었다. 무수리에서 내명부 최고직인 숙빈에 오른 최씨는, 사후에 육상궁으로 봉해졌다. 용흥사는 육상궁 최씨의 위패를 봉안한 원찰이 되었다.



1644년(인조22년)에 제작된 국가유산 보물 1555호 용흥사의 동종. 종의 고리에 네마리의 용이 있고, 종 가운데 옮겨 그릴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덕유스님(용흥사 주지)이 종을 울리고, 이어 김운태의 타종과 장보미의 소리, 서자영의 가야금, 이희원의 북으로 ‘명금’을 합주했다. 담양군문화재단 제공

1644년(인조22년)에 제작된 국가유산 보물 1555호 용흥사의 동종. 종의 고리에 네마리의 용이 있고, 종 가운데 옮겨 그릴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덕유스님(용흥사 주지)이 종을 울리고, 이어 김운태의 타종과 장보미의 소리, 서자영의 가야금, 이희원의 북으로 ‘명금’을 합주했다. 담양군문화재단 제공


덕유스님은 명상을 마치며 “딱 하나만 바라세요” 염원도 집중케 했다. 그리고 나무망치로 타종하자 ‘명금’이 시작되었다. 나무망치를 전해 받은 김운태가 종을 양손으로 나누어 쳤다. 종소리를 받들어 올리듯, 장보미가 징을 치며 ‘산중문답’을 읊었다. 점차 부싯돌 치듯 빨라지는 종소리, 어둠 속이라면 별빛이 튈듯했다. 마지막 연, ‘별천지에 인간 세상이 아닐세’를 소리할 때, 어느새 법당은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 되었다.



법당을 나와 눈을 드니 용구산이 웅장하다. 노령산맥의 줄기로 거북이 머리를 내미는 형상이라 붙은 이름이다. 골짜기에 천년고찰 용흥사가 있고, 대웅전 아래 용구루가 있다. 용구산에서 유래된 이름이겠지만, 용(龍)과 구(龜)의 조합이 낯설지 않다. 용과 거북 모두 물의 신이기에, 화재 예방을 위해 상량문에 써 온 거다. 용과 구를 받들어 풍류의 상량을 올리려고, 여성농악단을 잇는 연희단팔산대가 풍물을 울렸다.



여성농악단은 솟대쟁이패나 사당패 등이 떠돎을 멈출 때 출발한 마지막 유랑 단체다. 30년 전 이맘때, 옛 단원들을 모아 복원 공연을 했었다. 솔직히 시선을 끄는 정도겠거니 했다. 그런데 그런 나의 귀싸대기를 “짜짝!” 때렸다. 공이 울리자마자 무대로 튀어 나가는 복서, 피범벅으로 맹공을 퍼붓는 인파이터였다. 예술이란 치장보다 밥벌이에 대한 치열한 몰두가 이룬 극한의 소리였다.



연희단팔산대는 옛 단원들을 모시고 수년간 합숙했고 15년 넘게 판을 누볐다. 악기를 다루는 아랫놀음과 상모를 돌리는 윗놀음이 자유자재다. 동종의 기운을 받은 꽹과리가 “쩍쩍”거리니, 장구가 날벼락처럼 대청을 울렸다. 장구의 궁편은 양철 지붕에 우박 떨어지는 소리요, 채편은 장판방에 콩 쏟아지는 소리다. 그 쏟아지는 장단을 밟는 디딤에 춤이 충천했다. 이내 들이댓바람으로 솟구쳐 도니, 추임새가 튀밥처럼 빵빵 터졌다.



장구는 원래 천축의 악기인데, 실크로드와 중국을 거쳐 이 땅에 도달했다. 타클라마칸과 돈황을 지나며 달빛에 스러진 문명의 길이 감겨들었으리라. 장구의 길이 천축을 다녀온 혜초의 길과 같다. 그래선지 유랑하는 사당패와 함께 떠돌았다. 이 역사가 용구루에서 장구를 울리는 연유이기도 했다. 통창이 넓어 만추가 가득하니 안복(眼福)이요, 천정이 높아 울림이 크니 청복(聽福)이다. 바닥은 우물마루로, 좌정하면 저절로 미추를 각성시킨다. 이런 풍류 대청이 또 있으랴. 속인들이지만, 예찬을 금할 길 없어 ‘판굿’을 올린 것이다.



옛 여성농악단을 잇는 연희단팔산대의 장보미(꽹과리), 서자영(장구), 이희원(북), 유가비(징)가 ‘판굿’을 쳤다. 악기를 다루는 아랫놀음과 상모를 돌리는 윗놀음이 자유자재다. 들이댓바람으로 솟구쳐 도니, 추임새가 튀밥처럼 빵빵 터졌다. 담양군문화재단 제공

옛 여성농악단을 잇는 연희단팔산대의 장보미(꽹과리), 서자영(장구), 이희원(북), 유가비(징)가 ‘판굿’을 쳤다. 악기를 다루는 아랫놀음과 상모를 돌리는 윗놀음이 자유자재다. 들이댓바람으로 솟구쳐 도니, 추임새가 튀밥처럼 빵빵 터졌다. 담양군문화재단 제공


‘흥망이 산 중에도 있다’하는 ‘장안사’의 가사처럼, 용흥사도 번창과 폐허를 반복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복원하여 중흥하였다. 구한말 동학군과 의병의 은신처라 불탔으며, 6·25동란 때 전소되어 폐사되었다. 2000년 무렵부터 당시 주지였던 진우스님(현 조계종 총무원장)이 대웅전, 지장전 등 장엄한 금전벽우(金殿碧宇)를 다시 세웠다.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이룬’ 중창에 감복했는지, 숙빈 최씨가 용흥사를 위해 나섰다. 2010년 문화방송(MBC) 드라마 ‘동이’에 출연해 안방을 사로잡고, 수많은 관광객을 용흥사로 인도한 것이다.



산문부활(山門復活)처럼, 담양의 소리도 되살아나야 한다. 저 유명한 이날치는 용구산 너머 담양군 수북면에 살았던 전설의 명창이다. 그의 소리는 김채만을 통해 박동실에 이어졌다. 박동실(1897~1968)은 담양읍 객사리 사람으로 창극 무대를 휘어잡은 소리꾼이었다. 예인 집안이라 타고난 목이 좋았으나, 아편에 손을 댄 후 목이 상했다. 그러나 해방 전 아편을 끊은 의지 있는 소리꾼이었고, 해방 후 ‘해방가’, ‘열사가’ 등을 창작한 의식 있는 소리꾼이었다. 6·25 동란 후 월북하였고, 담양의 소리는 일시에 폐허가 되었다.



박동실의 월북으로 한동안 그를 언급할 수 없었다. 그 ‘한동안’은 가족에게 ‘한스러운 동안’이었다. “말을 할 수가 없지요”라고 말했던 아쟁 명인 박종선은 그의 조카고, “음∼ 생각을 말아요, 지나간 일들을”하는 ‘하얀 나비’를 불렀던 가수 김정호는 그의 외손자다. 연좌제가 시퍼렇던 시절,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불가피하게 거론할 때는 ‘박ㅇ실’로 이름 가운데 총구멍 난 표기를 해야 했다.



“꼭 여기 계셨어야 했는데….” 한승호(1924~2010)는 담양군 대전면 출신으로, 이날치, 김채만, 박동실의 계보를 잇는 적벽가의 인간문화재였다. 평소 소탈하였으나, 소리에는 까다로웠다. 제자들이 고음을 지르면, 저음으로 살살 말했다. “말어 말어 ‘박’ 벌어져.” 고음을 내려 악을 쓰면 ‘박’(머리)이 벌어진다는 농(弄)이요, 고음을 끌면 ‘박’(박자)이 벌어진다는 강(講)이었다. 이처럼 한마디에 안팎을 다 새긴 ‘일타쌍피’의 언어를 썼던, 옛 소리의 대가였다. 우정문은 11살에 한승호를 만났다. 쓴지 단지 모르고 입문해, 소처럼 따르면서 이수자가 되었다. 스승의 당부로 10년 전 담양에 내려와 활동하고 있다 한다.



용흥사 용구루의 무대, 통창에 풍경을 걸고, 마루에 한자 ‘요’(凹)처럼 청중이 둘러앉으니 둥둥 뜨는 판이 되었다. 고수 이치종의 북에 소리꾼 우정문이 적벽가 중 ‘새타령’을 불렀다. 명창 한승호를 사사한 소리, 창자가 끊어지는 소리로 새가 울었다. 담양군문화재단 제공

용흥사 용구루의 무대, 통창에 풍경을 걸고, 마루에 한자 ‘요’(凹)처럼 청중이 둘러앉으니 둥둥 뜨는 판이 되었다. 고수 이치종의 북에 소리꾼 우정문이 적벽가 중 ‘새타령’을 불렀다. 명창 한승호를 사사한 소리, 창자가 끊어지는 소리로 새가 울었다. 담양군문화재단 제공


우정문이 적벽가 중 ‘새타령’을 불렀다. 적벽 싸움에서 죽은 영혼들이 원조(怨鳥)가 되어 우는 적벽가의 눈대목이다. “산천은 험준하고 수목은 총잡한데….” 마치 스승 한승호의 소리를 찾아 학습하던 시간을 독백처럼 되뇌는 소리 같았다. 한승호도 이 대목은 월북한 스승의 소리를 물어물어 찾던 일을 회고하듯 소리했었다. 그리고 낙락장송처럼 높은 음정에서, 초혼조, 삣죽새, 꾀꼬리, 쑥꾹새 등이 울었다. 아랫배에 남은 숨을 다 뱉으며 울고, 창자가 끊어지는 소리를 끌어올려서 운다. 한승호의 소리로 울고, 우정문의 소리로도 울었다.



문득 새가 아니라 내가 울 것 같았다. 얼른 마이크를 들고 나가, 재담도 탁월했던 한승호의 일화를 전했다. 한번은 심청가를 부르는데, 소반 위 물병에 술을 넣고 마셔가며 소리한 모양이었다. 심청이가 인당수로 뛰어들 때 “풍덩”하고는 그대로 주저앉아 잠들어버렸다. 사태를 알아챈 고수가 북채로 옆구리를 찌르니, 번쩍 깨어 “인당수가 깊기는 깊은 모양이더라, 여태 빠지던 것이었다!” 하며 태연히 소리를 이었다고 한다.



동종에 새겨진 보살상을 화폭에 옮기는 ‘명선’의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자.



진옥섭 |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보고 ‘무(武)’를 알았고, 탈춤과 명무전을 통해 ‘무(舞)’에 빠졌고, 서울의 굿을 발굴하면서 ‘무(巫)’를 만났다. 기생, 무당, 광대, 한량을 찾아 ‘남무(男舞)’, ‘여무(女舞)’, ‘전무후무(全舞珝舞)’를 올렸다. 마침내 ‘무(無)’를 깨닫고, 사무친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를 출간했다. 전 국가유산진흥원 이사장을 역임했고, 현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이다. ‘사서삼담’, 4일은 서울 3일은 담양에 있으며, 무대와 마당 사이의 문화판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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