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교육·정보센터 송인호 소장
유럽 대륙에서는 종종 정치적 선의로 포장된 '좋은 의도, 나쁜 정책'이 발표된다. 그러나 간혹 국민이 압도적 이성으로 그 흐름을 단호히 거부하는 순간이 있다. 스위스에서 또 한 번 그런 장면이 연출됐다. 얼마 전, 상속·증여 자산 5000만 스위스프랑(약 62억 원)이 넘는 부분에 무려 50%의 세율을 매기는 상속세 신설안이 국민투표에서 부쳐졌고 놀랍게도 투표자의 80%가 반대 표결로 부결시킨 것이다. 그 법안의 세금 부과 대상은 극히 일부의 슈퍼 부자였지만, 스위스 국민 다수는 "이 길이 국가 전체에 손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러한 대다수 스위스 국민의 결정이 한국에 던지는 함의는 무엇일까.
스위스는 부자 나라다. 그러나 많은 국민은 이 법안이 자신에게 직접적 부담을 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반대표를 던졌다. 이는 '부자에게 더 내게 하자'는 단순한 정서적 접근보다 경제 체제의 지속 가능성을 우선한 선택이다. 스위스의 부(富)는 안정적이고 예측할 수 있는 정책 환경, 낮은 조세 부담, 기업 친화적 제도에서 비롯된다. 증세 찬성의 논리인 불평등 완화에 주목할 수 있겠으나 다른 한편인 상속세 급등은 이 체계 전체를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국민이 해석한 것이다.
이번 상속세안이 논란이 된 또 하나의 이유는 부자들의 국외 이탈 가능성 때문이다. 스위스는 이미 지방정부가 매기는 얕은 폭의 보유세를 운영하고 있고, OECD 38개국 중 조세부담률이 31위에 머무는 '절제된 조세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런 나라에서 50% 상속세 같은 급진적 과세가 등장하자, 고액 자산가들은 싱가포르·두바이·아부다비 등으로 이전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세금의 수혜 대상이 아닌, 세수의 핵심 공급자'가 이탈을 고민한 상황이었다.
스위스에서는 상위 10%가 전체 보유세의 86%, 고 소득세의 53%를 부담한다. 사실 이들 모두가 떠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극히 일부만 움직여도 국가 시스템에 변화가 있다는 실제의 충격은 큰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슈퍼 부자에게 과도한 패널티를 부여하는 조세정책이 '좋은 의도를 가진 나쁜 정책'이 될 수 있는지를 스위스 유권자들은 판단한 것이다. 설령 소수 부자의 기여가 국가 재정을 크게 뒷받침하는 현실일지라도 오히려 국민은 시스템에서 움직이는 선순환의 경제적 논리를 선택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스위스 국민이 이번과 같은 포퓰리즘을 거부한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2016년 '기본소득 국민투표'에서 스위스는 모든 성인에게 조건 없이 매달 2,500 프랑 (당시 약 300만 원)을 지급하자는 제안을 76.9%의 압도적인 반대로 거부했다. 국민 대다수에게 직접 혜택이 돌아가는 '달콤한 약속'이었음에도, 스위스는 다음 세대에게 부담이 되는 일시적인 정책은 결국 모두에게 손해라는 원칙을 선택했다.
당장의 포퓰리즘은 인기는 있을지 몰라도 나라의 선순환 경제 체제가 바뀔 수 있다. 부자에게 징벌적 세금을 매기거나, 조건 없는 현금을 살포하는 정책은 단기적으로 박수는 받을지 모른다.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성장, 투자, 재정 안정성, 다음 세대의 경제 기초가 훼손될 수 있다. 스위스 국민은 '누가 혜택을 보느냐'보다 '국가 경제 시스템이 지속 성장할 수 있느냐'를 우선했다. 바로 이 점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성숙을 보여준다.
스위스는 이번에도 '감성적 구호'를 단호히 거부했다. '단기 인기'보다 '장기 번영'을 선택했다. 재정의 지속 가능성, 기업 환경의 안정성, 자본의 유입과 축적--이 모든 기초가 중심이다.
스위스 국민은 또 한 번 포퓰리즘을 거부했다. 그 선택의 배경을 직시할 때, 한국은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 생각해 본다.
한국개발연구원 경제교육·정보센터 송인호 소장 |
송인호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교육·정보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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