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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승전보 [왜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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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경 |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내가 공부하는 국제정치학은 ‘어떻게 전쟁을 예방하고 평화를 구할까?’ 하는 학문이다. 전쟁을 어떻게 예방할지 그 주장은 제각기지만, 단 하나 공통점은 연민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전쟁의 참혹함을 예방하고 치료하려는 이성 전에는 전쟁을 겪어야 했던 이들에 대한 연민이 있다.



우리 할아버지는 한평생이 전쟁이셨다. 전쟁통에 아버지 여의시고, 전쟁통에 형님 다치시고, 전쟁통에 나무하시다 생사를 넘나드셨다. 전쟁이 당신을 힘들게도 했으나 당신의 삶 자체가 전쟁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감히 연민하게 된다.



당신께서는 열셋에 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증조할아버지를 여의셨다. 혼 떠난 시신을 직접 지게에 지고서 장지를 마련해 드려야 했다고 한다. 나는 아이였던 우리 할아버지를 본 적 없기에, 내 남동생 열세살의 모습으로 그때의 할아버지를 상상하게 된다. 그걸 떠올리고 있자면 목구멍이 아릿해진다. ‘누나 누나…집 같이 가’ 하며 교문을 서성이다 내 손 꼭 잡던 귀여운 손. 그때의 내 동생만 한 아이였던 할아버지는 사춘기를 막 시작한 그 작은 손으로 아버지를 묻어야만 했다. 선산에 올라 나의 증조할아버지를 몇번이고 뵀던 그 자리. 높고 높아 어른이 된 지금도 오르기 힘든 자리. 힘들다고 조금만 쉬었다 가자고 아버지께 졸라댔던 그 산에서. 선산을 오를 때는 그 역사를 걸어 올라가는 줄을 모르고, 그 아이의 길을 따라가는 줄을 몰랐다. 그 아이를 이제야 연민한다.



그러니까 이런 삶을 살아온 우리 할아버지의 성격이 억척스러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 같은 생을 살아내기 위해서, 살아남아 식구들 건사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했던 거다. 다시 없을 그 억척을 왜 어려서는 그렇게 싫어했을까. 이렇게 다시 볼 수 없고, 다시 들을 수 없는 잔소리를 왜 지겨워했을까. 어쩌면 그 고집스러움 덕에 내가 살아 있는 건데. 한번만 다시 “도경아 최선을 다해라. 우짜든동 최-썬을 다해서 살아보그라” 말하시는 목소리를 듣고 싶다. 얇지만 강직한 그 목소리가 그립다. “예, 할아부지” 하고 대답했지만, 진심이었던 적은 손에 꼽는다. 최선을 다해 살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희생 덕에 나는 양지바른 곳만 갈 수 있었고, 먹고 입을 수 있었는데. 그런데도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후회스럽다.



할아버지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날, 할아버지께 “다음 생에도 내 할아버지 해줘. 내 할부지” 했다. 그런데 할아버지 살아오신 삶을 생각하면 다음 생에는 할아버지가 나의 손자가 되면 좋겠다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내가 할아버지처럼 고생해서 이쁜 집 지어 놓고 초코파이도 사주고, 같이 석류 서리도 하고, 손잡고 매일 매일 개울가를 걸을 테다. 그러면 그 아이는 가난도 모르고, 전쟁도 모를 것이다. 좋아하는 붕어빵 많이 먹고, 쥐포도 많이 먹게 해줄 거다. 아가가 다쳐 오면 아까징끼 발라주고, 아플 때는 ‘할매랑 소프트(아이스크림) 사러 가자’ 하고선 나는 하드 먹고 아가는 부드러운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사줄 거다. 제 엄마가 못 먹게 하는 초코파이도 실컷 사줄 거다. 아가를 아프게 한다고 아들, 며느리 혼을 내줄 거다.



사랑을 줄 줄만 알고 사랑을 받을 줄 모르던 울 할부지, 사랑하는 내 하바야지. 장지에서 먼 산 보며 외치던 말, “김해 김가 ○○○파 ○대손 김공 85세 망” 이 말이 나는 꼭 승전보 같았어요. 울 할아버지, 내 할배요, 끝끝내 이겼다 맞제? 이제 전쟁일랑 그만하고 쉬다가 만나요. 심심하면 꿈에 나와요. 그때는 할배랑 내랑 선산에 손 마주 잡고 같이 올라가자. 혼자 말고 같이. 사랑해요.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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