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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의 존칭 ‘님’의 매력 [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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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대학교수로 일할 때 내 명함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나를 교수‘님’이라고 불렀다. 교수를 그만두고 책을 쓰고 집필과 연구를 자유롭게 하기 시작한 뒤로는 조금 복잡하다. 때로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요?”라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편한 대로 부르라고 하지만 어쩐지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극히 한국적인 이야기다.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여러 언어권에서는 직업과 관계없는 일반적인 존칭을 써도 전혀 실례가 되지 않는다. 영어에서의 ‘Ms./Mr.’나 일본어에서의 ‘상’(さん)을 예로 들 수 있다.



한국에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명함을 교환하고, 자연스럽게 명함에 적힌 직업이나 직급에 ‘-님’을 붙여 부른다. 직업에 ‘-님’을 붙이지 않으면 무례한 느낌을 준다. ‘교수’와 ‘교수님’은 한국어에서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렇다 보니 명칭이 외래어인 직업에도 당연히 ‘-님’이 붙는다. ‘팀장님’처럼 짧게도 붙고, ‘큐레이터님’이나 ‘코디네이터님’처럼 길고 다소 어색하게도 붙는다. 한국어를 처음 배우는 외국인들은 이게 참 어렵지만, 워낙 주변에서 많이 듣기 때문에 금방 익숙해진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님’에도 변화가 생겼다. 원래 직함 뒤에만 붙었는데, 20세기 말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점점 이름 바로 뒤에 붙기 시작했다. 즉 접미사였던 ‘-님’이 의존명사인 ‘님’으로 확장된 것이다. 민주 사회에서 상대의 직업, 성별, 나이를 비롯한 사회적 지위 등을 모르거나,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여길 때 무난히 사용할 수 있는 존칭이 필요해졌고, ‘님’이 바로 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홍길동 작가’의 직업을 모를 때 그저 ‘홍길동 님’으로만 불러도 실례가 되지 않는다. ‘홍 님’이라고 하면 안 되지만, 조금 친해지면 ‘길동 님’이라고 해도 괜찮다.



한국어에는 ‘님’이 아닌 다른 존칭도 존재한다. 바로 ‘씨’다. 이 역시 존칭으로 성명에 붙인다. 그런데 20세기 말부터 의미의 변화를 겪었다. 상대를 높이는 말이라기보다 동료나 아랫사람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로 여겨졌다. ‘씨’가 채울 수 없는 빈자리를 ‘님’이 대신하기 시작한 셈이다. 하지만 ‘씨’는 ‘길동 씨’처럼 이름 뒤에 붙이면 ‘님’보다는 더 친밀감이 느껴지기도 해서 평등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201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선생님’의 줄인 말인 ‘쌤’ 또는 ‘샘’도 일종의 존칭으로 볼 수 있다. 친근감은 훨씬 더 강하지만 속어의 느낌도 있어서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는 쓰지 못하고, 친근한 사이에서 애칭처럼 사용한다.



‘님’, ‘상’, ‘Ms./Mr.’는 상대방에 대한 정보 없이 성명만 알면 누구나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도시화가 이루어진 선진 민주 사회에서는 서로에 대한 정보를 모른 채 만나는 경우가 많다.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평등한 입장에서 만나는 일도 많기 때문에 ‘윗사람’, ‘아랫사람’이라는 개념이 예전에 비해 훨씬 약해졌다.



그렇지만 앞서 말한 세개 언어권의 존칭 중 ‘님’은 여전히 사회 전반에 정착되었다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국이 민주화 과정에서 언어 개혁에 대한 논의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한다. 영어의 ‘Ms’는 1960년대 여성 인권 운동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탄생했다. ‘Mrs./Miss’를 결합해 결혼 여부를 드러내지 않는 존칭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비롯했다. 일본어의 ‘상’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을 민주 국가로 만들려는 열의 속에 점차 보편화하는 과정을 거쳐 정착했다.



한국은 민주화 과정에서 수많은 개혁을 했고, 여전히 개혁은 더욱 심화 발전하고 있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존칭인 ‘님’도 그 무렵 등장했고, 이후 점진적으로 퍼져 나가 현재도 확산 중이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 보이긴 하지만, 이미 ‘님’의 사용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사회에 계속 진출하면서 ‘님’은 더욱 보편화할 것으로 보인다. 언어의 민주화인 동시에 직업으로부터 해방된, 개인으로 존재하는 민주 시민의 지향도 여기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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