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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신문에 “자궁에 염증 생겨 그림 못 그렸다” 화가 나혜석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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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48년 12월 10일 52세
화가 나혜석

화가 나혜석


1926년 화가 나혜석(1896~1948)은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 ‘천후궁(天后宮)’을 출품해 특선에 입상했다. 전년도 4회에 출품한 ‘낭랑묘(朗朗廟)’가 서양화 3등을 수상한 데 이어 연속 수상이었다.

나혜석은 조선일보 1926년 5월 20일부터 23일까지 4회에 걸쳐 ‘미전 출품 제작 중에’란 제목으로 글을 기고했다. 자신이 그림 그리는 이유와 태도 등에 관한 내용이다.

기고 글은 100년 전 여성이 쓴 글이 맞나 싶을 정도로 첫 문장부터 파격적이다.

“다다미 우에서 차게 군 까닭인지 자궁(子宮)에 염증이 생(生)하야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고 동시에 매일 병원에 다니기에 이럭저럭 겨울이 다 지나고 봄이 돌아오도록 두어장 밖에 그리지를 못하였다.”(1926년 5월 20일 자 3면)

나혜석 그림 '낭랑묘'. 1925년 6월 1일자.

나혜석 그림 '낭랑묘'. 1925년 6월 1일자.


나혜석은 1920~30년대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 인사였다. 도쿄 여자미술학교 졸업 후 1921년까지 그린 작품 70여 점을 경성일보사 내에서 전시한다는 소식(1921년 3월 16일 자 2면) 같은 미술 관련 기사부터 ‘나혜석 여사 가정 방문기’(1925년 11월 26일 자 3면) 같은 사생활 관련 기사까지 지면에 실렸다.

1927년 6월에는 1년 반에 걸쳐 세계 여행을 떠난다는 ‘나혜석 여사 세계 만유(漫遊)’ 기사가 실렸다. 아이 셋을 두고 남편 김우영과 함께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러시아·영국·독일·이탈리아·프랑스·벨기에·오스트리아·네덜란드·스페인·스위스·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튀르키예·페르시아·체코·그리스·미국 등을 순회한다는 내용이다.


1926년 5월 15일자 3면.

1926년 5월 15일자 3면.


나혜석과 1920년 결혼한 김우영(1886~1958)은 교토제국대학 출신으로 변호사로 일하다가 일본 외무성 관료가 됐다.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근무 중 세계 연수 기회를 얻었다.

나혜석은 “일 년 반이라는 짧은 세월에 무슨 공부가 되겠습니까마는 남편이 구미 시찰을 떠나는 길인고로 이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잠깐잠깐 각국의 예술품을 구경만 하는 것이라도 적지 않은 소득이 있을 줄 알고 가는 것이 올시다”(1927년 6월 21일 자 3면)라고 소감을 밝혔다.

나혜석 '자화상'.

나혜석 '자화상'.


나혜석은 이 여행길에서 ‘불륜 사건’을 일으켰다. 3·1운동 민족 대표로 훗날 변절하는 최린(1878~1958)과 파리에서 만나 깊은 관계를 가졌다. 나혜석은 당당했다. “혼외 정사는 진보된 사람의 행동”이라며 여성도 사랑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귀국 후 김우영과 1930년 11월 이혼했다. 자신을 멀리하는 최린을 대상으로 ‘정조 유린’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1934년 잡지 ‘삼천리’ 8월 호·9월 호에 걸쳐 ‘이혼고백서’를 썼다. 여자에게 정조를 요구하는 남자의 위선적 의식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조선의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1927년 6월 21일자 3면.

1927년 6월 21일자 3면.

나혜석은 이후 ‘소품전람회’(1935년 10월 27일 자 2면) 전시회 기사가 실리기도 했지만 대중에게서 잊혀져 갔다. 1948년 12월 10일 저녁 8시 30분 서울시립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영양실조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별세 기사는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별세 후 다시 실린 기사는 1962년 4월 24일 자였다. ‘최초의 양화가 나혜석 여사/ 철저한 자유주의자’라고 조명했다.


1998년 4월 20일자.

1998년 4월 20일자.


화가 김병종은 조선일보 연재 ‘화첩기행’에서 “자신의 예술과 사랑에 오만하도록 당당했던 그 조선 예원의 꽃은 죽음을 지켜본 사람도, 시신을 거두어 묻어준 사람도 없이 ‘관보’의 사망자 광고란에 그렇게 한 줄로 남았다”(1998년 4월 20일 자 22면)고 썼다.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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