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호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부원장 |
지난달 25일 고용노동부는 '2025년 3분기(누적) 재해조사 대상 사망사고 발생현황' 잠정결과를 발표했다. 올해 9월까지 사업주 안전조치의무 불이행으로 사망한 근로자 수는 457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14명(3.2%) 늘었고 사고 건수도 440건으로 29건(7.1%) 증가했다. 서울-세종 고속도로 구조물 붕괴와 경부선 철로작업 중 열차충돌과 같은 대형사고가 발생하는가 하면 50인 이하 영세사업장 사고도 잇따른다. 이는 특정 업종이나 규모를 불문하고 우리 산업계 전반에 걸쳐 위험요인이 누적·확산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7월 국무회의에서 강력한 제재와 중대재해 근절대책을 지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의 산업안전체계는 여전히 사고 이후의 조치에 집중된 사후복구 중심 구조다. 사고는 예측하기 어려운 형태로 분화되고 위험은 더 복잡하게 얽히면서 산업재해는 제도적 관리능력을 넘어서는 속도로 증가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사고 이후가 아니라 사고 이전을 겨냥한 선제적 대응으로의 전환이다. 미국 에너지부(DOE)는 전력망 및 원자력시설의 안전성과 복원력을 강화하기 위해 고성능 컴퓨팅을 활용한 디지털트윈 기반 사고예측 연구를 추진한다. 유럽첨단제조연합(EFFRA)은 AI 기반의 '제로 디펙트 매뉴팩처링'(Zero-Defect Manufacturing)과 '제로 액시던트 워크플레이스'(Zero-Accident Workplace) 구현을 목표로 작업자의 생체신호와 환경데이터를 통합적으로 분석하는 시스템 개발에 주력한다. 올해 국제노동기구(ILO)가 발표한 보고서 역시 자동화와 스마트 모니터링 시스템이 위험노출을 줄이고 부상을 예방하며 작업환경 전반의 질을 향상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사고가 발생한 후 복구하는 기존 접근과 달리 위험을 읽고 미리 차단하는 완전히 새로운 안전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정부가 2026년도 재난안전 R&D(연구·개발) 투자를 2조1000억원에서 2조4000억원으로 확대키로 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단순히 투자만 늘리는 데 만족하지 말고 산업현장의 기술공백을 신속히 발굴하고 데이터 기반으로 위험요인을 명확히 진단하며 현장에서 즉시 활용 가능한 예방기술을 적시에 공급해야 한다. 특히 산재데이터를 통합분석해 위험을 조기에 가시화하는 예측 기반 안전관리체계는 산업안전 혁신의 핵심 인프라가 될 수 있다. 이와 함께 산업안전 R&D 구조의 전환도 필요하다. 기술개발-실증-제도개선-시장창출을 하나의 연속된 전주기로 통합하는 임무중심(Mission-oriented)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재난대응에 공통으로 적용 가능한 핵심기술을 집중 지원하는 전략과 함께 공공조달 기반 초기시장 진입지원, 민관 기술매칭 플랫폼 구축 등 기술의 확산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장치 역시 강화해야 한다.
선제적 산업안전체계는 기존의 사후감독체계가 확보하지 못한 '예측지능'을 제공해야 한다. 위험요인을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산업현장의 변화를 정량화하며 사고 가능성을 예측하는 것이다. 또한 산업별 공정 특성을 반영한 안전 로보틱스, 고위험환경 센싱기술, 지능형 보호장비 등을 통해 기존 인력 중심 대응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보호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여기에 정부의 임무중심 R&D 투자가 결합할 때 연구성과가 실험실을 넘어 산업현장의 안전으로 직결될 것이다.
산업재해는 통계의 등락을 넘어 생명과 노동의 지속가능성에 직결된 문제다. 사후 대응 중심의 안전관리로는 더 이상 근로자를 보호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R&D를 포함한 과학기술의 역할은 선택이 아니라 국가적 필수역량이다. 기술과 정책, 현장의 결합으로 '사고를 막을 수 있는 능력'을 국가적 시스템으로 구축해야 한다. 과학기술이 산업현장의 일상적 안전관리까지 내재화될 때 산업안전의 구조적 전환은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손병호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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