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수는 백범 김구의 소년 시절 이름으로 이 영화에서는 백범의 일생 중 청년 시절인 1896년도를 배경으로 그려냈다. 김창수 역을 조진웅이 맡았다. |
물론 그렇다. 빈집 털이 수준이라면. 그런데 그가 열거한 비행에 ‘강도·강간’을 추가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의할까. 송 신부도 그걸 알았기 때문에 열거하지 않았을 것이다. 관련 보도가 나온 뒤 배우 조진웅을 두둔하는 거의 모든 글들이 그 단어를 쓰지 않았다. 그저 ‘청소년 비행’ ‘어두운 과거’라고 뭉뚱그릴 뿐이다. 왜 그럴까. 그 단어에는 종교적 관용, 소년 사법의 원칙, 정파적 지지를 단숨에 깔아뭉개는 끔찍함이 있기 때문이다.
송 신부가 청소년을 교화하고 18세 조진웅군이 범죄를 저지를 무렵 나는 사회부 기자로서 경찰서를 취재했다. 1994년이다. 친분이 있던 형사가 차량을 훔친 20대들을 검거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카메라와 필름을 압수해 현상했다. 여성 수십 명의 나체 사진이 나왔다. 성적 학대 장면도 있었다. 압수품에서 납치 피해자를 무더기로 찾아낸 것이다. 그런데 형사는 범인 검거보다 피해자를 찾는 일에 더 고생했다. 피해자들이 신고를 안 했기 때문이다. 피해자를 찾아도 본인이란 사실을 부인했다. 인정해도 가정이 깨질까 두려워 고소를 거절했다.
지금은 가해자의 주홍 글씨를 걱정하지만, 당시엔 성폭행 피해자의 주홍 글씨가 훨씬 심각했다. 성폭행 범죄 암수율(숨겨진 범죄 비율)을 99%로 추정할 때였다. 범인들이 신고를 못 하게 하려고 강도짓을 하면 성폭행까지 한다고 했고, 많은 경우에 그게 사실이었다. 신고를 못 하자 다시 찾아가 돈을 빼앗고 다시 성폭행한 범죄자도 봤다. 학폭은 문제 의식도 없었을 때다. 성인이든, 미성년이든 그동안 알려진 그들의 범죄도 야만의 시대와 닮아 있다. 조진웅씨 파문은 한국 사회가 잊고 있던 이런 야만의 기억을 퍼 올린 것이다.
배우 조진웅이 2025년 8월 15일 광복 80주년 경축식에 깜짝 등장해 국기에대한경례 맹세문을 낭독했다./KBS뉴스 유튜브 |
그저 배우의 문제일 뿐 원래 복잡한 문제가 아니었다. 송 신부가 열거한 수준의 비행이었다면 누가 뭐라고 했겠나. 한인섭 서울대 명예교수 말대로 “어둠 속을 헤매는 청소년의 좋은 길잡이로서 상찬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수준이 아닌 것이다. 조씨가 어떤 정권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행사에서 어떤 폼을 잡았는지는 전부 부차적인 문제다. 배우는 이미지로 사는 직업이다. 한 교수 표현을 빌리면 ‘그의 이마빡에 주홍 글씨’가 새겨진 것은 언론 때문이 아니라, 배우가 감당하기엔 너무 심각한 과거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의 은퇴 선언으로 끝났다면 지금은 용산 ‘현지 누나’와 박나래 ‘주사 이모’가 소셜미디어를 뒤덮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옹호론이 폭발했다. 소속사가 “성폭행 행위와는 무관하다”고 밑도 끝도 없이 발표한 직후였다. 한 교수는 그에 대한 비판을 “독립운동가의 약점을 잡아 대의를 비틀고 생매장시키는 책략(과 같다)”이라고 했다. 박찬운 검찰개혁추진단 자문위원장은 “정의가 아닌 집단 린치”라고 했다. 시인 류근씨는 “소년원 근처에 안 다녀본 청춘이 어디 있느냐”고 했다. 장발장에 빗대는 글도 봤다. 민주당 의원들도 가세했다. 누가 봐도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지식이 있고 글 쓰는 사람들이 쏟아냈다. 정치적 편견이 그들의 윤리 감각을 망가뜨렸다.
몇 년 전 모임에서 누군가 유력 정치인의 과거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전과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어떻게 국민 절반이 지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법조인으로 40년 일한 사람이 답했다. “국민 절반이 그처럼 살지 않았을까. 그 사람들에게 그의 과거는 큰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세태를 걱정하는 의미였다. 조진웅씨 문제가 있은 뒤 가수 이정석씨가 “너희는 그리 잘살았나”라는 글을 올렸다. 모두 비윤리적인 삶을 살고 있으니 문제 삼을 자격이 있느냐는 얘기일 것이다. 공인을 비판하면 이런 삿대질이 돌아오는 세태가 됐다. 윤리가 붕괴된 세상, 야만의 시대로 함께 끌려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조진웅씨 논란은 의도치 않게 한국 사회의 윤리 수준을 반영하는 바로미터가 됐다. ‘배우의 본질’에 관한 단순한 문제가 정치 문제로 확대됐기 때문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부각된 소년 사법의 여러 문제는 논의할 만하다. 하지만 조진웅씨가 돌아와야 많은 비행 청소년이 희망을 얻는다는 해괴한 논리엔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는 상징이 될 것이다. 그가 아니어도 비행 청소년이 희망을 얻을 윤리적 인물은 한국 사회에 차고 넘친다.
[선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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