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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대한민국] GDP 38%가 미국 주식에… 서학 개미가 만든 ‘부자 한국’

조선일보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수석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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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해외 주식투자 살펴보니
이재명 대통령이 9월 25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를 방문해 개장 벨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대통령실

이재명 대통령이 9월 25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를 방문해 개장 벨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대통령실


지난 5일 미국이 공개한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는 미국 안보 전략의 근본적 변화를 보여줬다. 예상대로 이 보고서에는 한국이 중국 견제를 위한 무역 정책 조율과 방위비 증액, 그리고 적극적 군사 활동 수행을 요구받는 국가로 3번 등장했다. 그런데 뜻밖의 구절에서 한국은 다시 호명된다. 유럽·일본과 더불어 ‘막대한 대외 순자산을 보유한 국가’로 지목되며,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에 맞설 미국의 전략적 투자에 동참할 대상으로 언급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은 한국을 유럽·일본과 동등한 수준의 부자 국가로 인식하고 있다.

◇미국 주식 보유액 아시아 3위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나라가 미국 주식 및 채권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재무부가 지난 4월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미국 주식 및 채권 보유 총액은 2024년 6월 기준으로 6870억달러에 달한다. 독일, 호주 등에 이어 14위 규모다. 특히 주식 보유액은 4860억달러로 해외 국가 중 12위이며, 아시아에서는 일본(9750억달러), 싱가포르(5660억달러)에 이은 3위다. 우리나라 GDP의 약 38%에 해당하는 막대한 자산이 태평양 건너 미국 주식시장에 담겨 있는 셈이다.

/그래픽=박상훈

/그래픽=박상훈


과거에 해외 주식 투자는 전문가들의 영역으로 간주됐다. 개인 투자자들은 해외 투자 시 펀드나 국내 시장에 상장된 상장지수펀드(ETF)를 주로 선택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서학개미’들의 움직임은 특별했다. 개인이 미국의 개별 주식에 직접 투자하는 것을 유독 선호한 것이다. 예탁결제원 자료를 보면, 개인이 미국 주식에 투자한 금액은 1597억달러(약 235조원)에 이른다. 1년 전 1121억달러와 비교해 42.4%나 폭증했다. 서학 개미의 미국 사랑은 압도적이다. 전체 해외 주식 투자 금액의 94%가 미국에 쏠려 있다.

일러스트=정다운

일러스트=정다운


◇테슬라와 엔비디아에 28.5%

개인 투자자들이 보유한 상위 50개 해외 종목을 보면, 놀랍게도 49개가 미국 주식 또는 ETF다. 그중에서도 테슬라(283억달러)와 엔비디아(172억달러)에 투자가 집중돼 있다. 전체 미국 주식 투자 금액의 28.5%에 달하는 규모다. 상위 50개 종목을 더 세분화해 보면, 서학 개미들이 미국 기업의 성장세에 기대어 ‘매우 공격적인 단기 고수익’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수 상승 폭의 2~3배를 보장하는 레버리지 ETF가 전체 ETF 21개 가운데 7개를 차지할 정도다.

미국 주식 사랑은 높은 수익률이라는 유혹 때문이다. 지난 5년을 놓고 보면 S&P 500 지수에 연동된 ETF에만 투자했어도 86% 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고, 엔비디아에 투자했다면 1249%의 경이로운 수익을 기록할 수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 같은 빅테크 기업들도 130~250% 상승했다. 여기에 풍족한 배당과 원화 약세에 따른 환율 효과까지 더하면 수익률은 더 높아진다. 같은 기간 한국 종합주가지수는 약 42% 상승에 그쳤다. 그마저도 올 상반기 이후 급등했을 뿐 과거의 수익률은 미국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왜 태평양 건너편에 미래를 거나

미국 주식에 투자하면서 개인들은 미국의 혁신과 기술력을 확신하게 됐다. 기업 이익을 자사주 소각을 통한 주가 관리와 높은 배당으로 모든 주주에게 보답하는 미국 기업 문화를 보면서, 소액 주주가 대주주와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상속 부담을 낮추기 위해 주가 상승을 바라지 않는 대주주, 오랜 기다림 끝에 과실을 누릴 만하면 물적 분할로 대주주만 이익을 독식하는 국내 주식 시장에 환멸을 느끼던 투자자들에게 미국 주식 시장은 ‘천국’과 같았다.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을 ‘부유한 파트너’로 지목한 배경에는 우리 국민이 피땀 흘려 쌓아 올린 이 막대한 대외 자산이 자리 잡고 있다. 서학 개미의 투자금은 아이러니하게도 한·미 동맹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하는 ‘인질’이자 강력한 레버리지인 셈이다. 환율 상승의 부작용을 우려하기에 앞서, 우리 국민이 왜 태평양 건너편에 미래를 걸었는지 직시해야 한다.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는 곳으로 돈이 흐르는 것은 만유인력과도 같다. 혁신과 주주 환원이 흐르는 곳, 그곳에 바로 돈이 머무는 법이다.

해외 주식 개인 투자의 역사

한국에서 개인의 해외 주식 투자가 처음 허용된 때는 1993년이다. 수출 호조와 외화 유입 증가에 따른 원화 강세를 해소하기 위한 정책의 하나였다. 펀드 방식의 간접 해외 투자만 되던 개인의 해외 투자는 1994년 7월부터 1억원까지 직접 투자가 가능해졌다. 당시 투자 대상은 OECD 회원국, 홍콩, 브라질 등 정부 지정 국가로 제한됐다. 1996년 4월부터는 금액 제한이 폐지됐다. 2006년에는 개인 직접 투자에 대한 모든 제한이 사라졌다. 당시의 원화 강세를 완화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일반적으로 해외 주식 직접 투자는 높은 거래 비용, 보유 증권 관리 및 복잡한 과세 문제 등으로 매우 제한적이다. 해외 대형 증권사들조차 소매 고객 대상으로 국제 거래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거나 건당 20~50달러의 높은 수수료를 부과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가에서 개인의 해외 투자는 펀드나 자국 시장에 상장된 ETF를 통한 간접 투자가 보통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해외 주식 거래 수수료가 미국 주식 기준으로 0.25%로 상당히 저렴하다. 이는 자본시장법에 따라 해외 주식 결제 및 보관 업무가 예탁결제원에 집중돼 이뤄지기 때문이다. 예탁결제원은 씨티은행 등 해외 증권 보관 기관을 5곳 선임해 40국 증권에 대한 예탁을 지원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이례적인 방식이다. 예탁결제원을 통해 개인들의 개별 투자가 대규모 단일 투자로 인식되면서 거래 비용 및 각종 수수료 인하 효과를 거둔다. 증권사들의 치열한 경쟁도 해외 주식 거래 수수료를 낮추는 데 일조했다. 이런 제도적 기반이 서학 개미 열풍에 기름을 부은 셈이다.

대만은 비슷하면서 다르다

수출 증대 위해 환율 약세 유도

최근 원화 약세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지난 7월 초 1달러당 1367원이던 환율은 최근 1468원을 기록했다. 5개월 만에 가치가 7.3%나 하락한 것이다. 원화만큼 약세를 보이는 통화는 대만 달러다. 7월 미화 1달러당 29.19였던 대만 달러는 최근 31.37로 가치가 7.4% 떨어졌다.

그런데 대만 경제는 지금 아주 좋다. 10월에 226억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내면서 61억달러를 기록한 우리를 압도했다. 일반적으로 대규모 외화가 유입되는 국가의 통화는 강세가 돼야 하지만 대만 달러는 약세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대만 달러가 적정 가치에 비해 약 55% 저평가된 것으로 분석했다.


대규모 무역수지 흑자에도 불구하고 대만 달러가 약세를 보이는 이유는 ‘수출 확대를 위한 환율 관리’ 때문이다. 대만은 생명보험회사들로 하여금 해외 투자를 늘리도록 유도하는 방식을 통해 쌓이는 달러를 해외로 유출하고 있다. 그 결과 대만 생명보험회사들이 보유한 미국 내 자산은 6820억달러에 이른다.

대만 달러의 약세 유지는 대만 수출 호조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문제는 대외 투자 규모가 너무 커지면서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보험 가입자에게 약속한 금액을 지불하려면 환 헤지를 통해 환율을 고정해 변동성을 제거해야 하지만, 투자 규모가 너무 큰 탓에 전체 투자액의 30%에 이르는 약 2000억달러의 자산은 환율 변동에 노출돼 있다. 만약 대만 달러가 강세로 전환되면 생명보험사들은 큰 타격을 입고 경제가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수출을 위해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대만 상황은 최근 한국이 겪는 딜레마와 묘하게 겹쳐 보인다. 한국과 대만 모두 막대한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가며 자국 통화 가치가 떨어지는 상황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한국은 개개인의 투자 선택이 주를 이루고 대만은 정부 차원의 정책적 개입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비슷한 풍경, 다른 고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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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수석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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