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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라떼는 말이야’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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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는 말이야, 토요일에도 학교 갔지.” “내가 왕년에는 이 동네에서 제일 잘나갔지.”

회식 자리에서, 친지 모임에서, 혹은 TV 드라마에서 우리는 이 ‘라떼 혹은 왕년 서사’를 자주 듣는다. 듣는 이에게는 꼰대의 잔소리처럼 들리기도 하고, 말하는 이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습관 같은 말이 되기도 한다. 요즘 젊은 세대의 ‘라떼는(나 때는) 말이야’ 풍자는 유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세대 간 긴장을 만드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나이 들수록 라떼와 왕년을 자주 입에 올리게 될까? 나이가 들면 체력은 떨어지고, 정년퇴직을 앞두고 사회적 역할도 줄고 명함의 무게 또한 가벼워진다. 마음속에는 “나는 여전히 가치 있는 사람일까?”라는 작은 의문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 마음의 빈틈을 조용히 메워주는 것이 과거의 기억, 즉 ‘왕년’과 ‘라떼’이다. 과거는 나의 발자취이자, 내가 여전히 의미 있는 존재라는 증거가 되어준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 교수는 ‘시간 조망’ 개념을 통해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삶의 태도와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긍정, 과거-부정, 현재-쾌락, 현재-숙명, 미래-지향 등 다섯 가지 시간관을 제시했는데, 이 중 과거-긍정 관점은 지나온 시간을 애정과 감사로 바라보는 태도이며, 과거-부정 관점은 후회나 상처 중심의 시각이다. “왕년에는…”이라는 말은 단순히 과거를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나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심리적 회상의 과정으로 과거-긍정의 관점에 가깝다. 그러나 과거-부정 관점이 강할수록 이 회상은 비교, 훈계, 서운함의 형태로 전달되기 쉽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과거를 어떻게 해석해 현재와 연결하느냐이다. 짐바르도 교수가 조화로운 시간관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일 발달심리학자 파울 발테스 교수는 노년기를 “손실과 이득의 균형이 중요한 시기”라고 설명했다. 즉, 체력과 사회적 지위는 줄어들지만 경험과 지혜는 더 깊어진다. 왕년과 라떼 이야기는 사실 이 균형을 찾기 위한 자연스러운 심리적 노력이며, 현재의 손실을 과거의 성취로 보완하고 자기 가치를 회복하려는 방식이다. 다만 이런 회상이 듣는 사람 특히 세대 차이가 나는 사람들에게는 종종 간섭이나 훈계처럼 들릴 수 있어 관계에 거리를 만드는 것이 문제다.

어떻게 하면 세대 간 오해 없이 건강한 회상이 가능할까? 첫째, 과거를 비교의 기준이 아니라 지혜의 자원으로 꺼내야 한다. “라떼는 이런 게 기본이었지”라고 말하기보다 “그때 이런 일을 겪었고,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게 됐어”라고 말하면 과거는 훈계가 아니라 경험에서 나온 지혜가 된다. 둘째, 현재의 삶을 풍성하게 채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취미, 관계, 일상이 풍부해질수록 과거에 기대어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셋째, 대화의 온도를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상대의 표정과 분위기를 읽으며 회상의 길이와 강도를 조절한다면 같은 이야기도 따뜻하게 전달될 수 있다.


발테스 교수가 말한 손실과 이득의 균형은 결국 현재의 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고, 짐바르도 교수가 강조했듯이 과거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할 때 사람은 훨씬 안정되고 따뜻한 방식으로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직함이나 업적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내가 왕년에는…”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에는 한 사람의 삶과 시간이 켜켜이 담겨 있다. 그 조각들이 우리를 과거에 머물게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의 삶을 더 깊게 비춰주는 거울이 될 때 세대 간 대화는 훨씬 더 자연스럽고 따뜻해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조용히 미소 지으며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해본다. “라떼는 말이야…”

김기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

김기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

김기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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