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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고 비범한 생애 [김탁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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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직후인 지난해 12월4일 새벽 국회로 들어가려는 군 차량을 시민들이 막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직후인 지난해 12월4일 새벽 국회로 들어가려는 군 차량을 시민들이 막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김탁환 | 소설가



내란이 일어난 지도 한 해가 지났다. 2024년 12월3일을 들여다보는 각종 방송과 행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계엄의 밤을 증언하는 책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정치인들의 회고록도 있지만, 국회의사당으로 달려갔던 시민들의 증언을 모아 만든 책들이 단연 눈에 띈다. 계엄군을 태운 차량을 막아서고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도록 도운 시민들의 활약을 따라 읽다가 궁극적인 질문에 가닿았다. 평범한 시민들의 비범한 용기는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구술생애사란 개념과 작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술’(口述)은 말로 이야기한다는 뜻이고, ‘생애’(生涯)는 한 사람의 삶 전체이며, ‘사’(史)는 역사이다. 뜻대로 풀면, 말로 이야기한 인생을 기록한 역사가 곧 구술생애사인 것이다. 예전에도 특정 사건이나 상황을 중심으로 당사자나 목격자의 증언을 기록한 책들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저마다의 삶이 갖는 다채로움보다는 특정 계층이나 직업의 공통점에 관심을 더 쏟았다.



일찍이 영국 소설가 존 버거는 ‘단 한 문장을 반박하기 위해 한 인생 전체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라고 썼다. 내란의 그 밤만 분석해선 시민들의 언행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계엄과 내란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그 밤을 조망하듯, 여의도에 모인 시민들 각자의 인생 속에서 그 밤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구술생애사란 개념이 확립되면서 노년층이 새롭게 주목을 받았다. 은퇴 후 직접 자서전을 쓰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는 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정돈하여 세상에 내놓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몇몇 시군에선 따로 예산까지 편성하여 구술생애사 작업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내가 사는 고을에도 ‘곡성 어르신들의 인생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2017년부터 9년째 책을 묶어왔다. 자신의 생애를 구술한 곡성군민이 11개 읍면 통틀어 222명에 이른다. 저마다의 소중한 삶이 담긴 개인사인 것은 기본이고, 같은 마을에서 살아온 이들의 구술생애사가 여러 해 동안 모여 마을의 역사를 이루는 밑바탕이 되고 있다.



노회찬재단 구술생애사팀에서 출간한 ‘우리들의 드라마’는 지금까지 나온 구술생애사와는 명확히 다른 점이 있다. 기록자를 위한 자리를 도드라지게 따로 마련한 것이다. 기록자의 이름과 약력이 소개될 뿐만 아니라 생각하고 느낀 점들까지 후기로 담았다. 이 작업에 참여한 까닭과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듣고 기록했는지 과정까지 꼼꼼하게 실려 있다.



자신의 생애를 이야기하는 사람 곁엔 그것을 듣고 기록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구술자가 말한 대로 전부 적었겠거니 여길 수도 있지만, 칠팔십년의 나날을 줄여 말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 그 말을 다듬어 쓰는 것 또한 힘겹다. 얼마나 정성껏 듣느냐도 중요하고, 또 그렇게 들은 이야기를 어떻게 나누고 모아 배치하느냐도 중요하다. ‘우리들의 드라마’를 읽어가노라면 구술자들의 파란만장한 삶에 젖을 뿐만 아니라, 기록자들의 후기를 통해 그 생애를 왜 이렇게 꾸리고 저렇게 펼쳤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가령 라이더유니온 조합원이자 마사지사인 우상택님의 삶을 기록한 이는 심리상담사 오현정님이다. 두 사람은 2023년 가을에서 2025년 2월까지 17개월 동안 아홉번을 만났다. 그리고 열여섯살 신문 배달부터 지금까지, 구술자가 겪은 불의와 착취와 배신의 나날을 거듭 확인했다. 고통과 슬픔에 마냥 짓눌리기보단, 낯선 동네로 배달을 마친 뒤 전망 좋은 곳에서 사진도 찍고 돌아다니며 자유롭고 재미있게 지낸 순간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기록자는 특별한 결심을 한다, 책이 나온 뒤에도 구술자가 맞닥뜨릴 삶의 증인이 되고 싶다고.



구술생애사는 구술자가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고 기록자가 수동적으로 듣고 적는 작업이 아니다. 한 인생을 함께 오래 깊이 들여다보면서, 구술자도 변화하고 기록자도 변화한다. 새로운 연대가 시작되기도 한다.



내란이 터진 밤은 단 하루지만, 그걸 막으려고 국회 앞으로 모여든 시민들 각자의 삶을 듣고 기록하기까진 긴 시간이 필요하다. 울퉁불퉁하고 모호하고 때론 모순되며, 그 밤과 직접 연관이 없는 나날을 오래 거듭 어루만져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글이 나왔을 때 우리는 독자의 자리에 만족하지 말고, 내란의 밤에 행동한 시민들과 함께 그것을 듣고 기록하려 애쓴 시민들의 노력까지 가늠하는 자리로 나아가면 어떨까. 평범한 비범을 놓치지 않고 품으며 닮아가기 위해, 우리가 어디서 어떤 자세로 서 있어야 하는가를 되살피는 연말이 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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