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해인사의 김장은 총 나흘간 진행된다. 무려 구천포기 김장이다. 첫째 날엔 배추밭에서 배추를 뽑고 둘째 날엔 대형 수조에 배추를 절이고 셋째 날엔 배추를 건지고 무를 썰어 소를 준비한다. 마지막 날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모여 배추를 버무린다. 이렇게 일년 동안 해인사 대중이 먹을 김치를 준비하는 것이다. 소금을 제외하고 모든 재료는 다 절에서 나고 자란 것들이다.
내가 이 사실을 아는 이유는 숨숨 덕분이다.
해인사는 봄이 되면 버려진 밭을 찾아다닌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이젠 버려진 밭을 해인사가 사고 거기 만포기 배추를 심는다. 사실 더 심을 것이다…. 천포기는 겨우내 먹이를 찾아 나서는 동물들을 위해 남겨두고 구천포기를 뽑아야 했다. 조를 나눠 1조는 배추의 목을 따고 2조는 목이 따인 배추를 한군데 모아 배추산을 만들고 3조는 줄지어 서서 배추를 서로에게 던지며 트럭에 실었다…. 이 전투의 지휘는 원주스님이 맡았다. 드넓은 배추밭에 원주스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이 보입니데이! 더 빠르게 하이소!
눈에 보일 듯 구천포기 배추 수확 장면을 글로 쓴 이가 바로 숨숨이다. 일요글방에 처음 온 숨숨은 해인사에서 일을 한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에? 우리는 모두 살짝 놀랐는데 절에서 일하는 사람이 글방에 온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해인사라면 경상남도 합천에 있는 천년 고찰이 아니던가. 스님이 아닌 사람은 절에서 무슨 일을 할까? 여러가지 궁금증은 다음주부터 숨숨이 써 오는 글을 보면서 풀려나갔다. 일테면 이런 거다.
한 안건이 끝날 때마다 주지스님이 직접 목탁을 탁탁탁 두드리는데 일정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마치 나를 위한 에이에스엠알(ASMR) 같다. 거기에 동글고 매끈하기까지 한 맥반석 달걀 같은 스님들의 머리를 지켜보고 있으면 묘한 안정감에 나도 모르게 절로 잠이 온다. 해인사에는 매주 화요일 9시에 총무 재무 회계 등 소임을 맡은 스님들과 종무소 직원들이 모여 종무회의를 진행한다. 해인사의 업무 시스템은 대기업을 방불케 한다. 보고 라인만 해도 담당자 실장 담당국장스님 재무스님 총무스님 주지스님, 무려 다섯 단계를 거쳐야 하나의 결재를 받을 수 있다. 회의 내용 역시 참석자들이 승려복을 입고 빡빡머리의 스님들이라는 사실이 다를 뿐 여느 회사와 다를 바가 없다.
해인사에서 요즘 가장 공을 들여 하는 일은 팔만대장경 복각 사업이다. ‘주지스님과 발가락 양말’이라는 글에서 숨숨은 이 이야기를 명랑하게 풀어놓는다.
그나저나 경판 좀 봤노?
아뇨 스님. 내부관람은 금지라고 해서 밖에서만 살짝 봤습니다.
얌마 이거 큰일 날 소리 하네. 눈으로 직접 봐야 일을 한데이. 얼른 신발 신고 나와라.
첫 출근 날 숨숨은 주지스님과 함께 팔만대장경을 보관해둔 곳으로 향한다.
나를 데리고 팔만대장경이 모셔져 있는 장경판전 안으로 들어온 주지스님은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었다. 다시 한번 구멍 난 발가락 양말 사이로 엄지발가락이 뽈록 나와 인사를 건넸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엉거주춤 신발을 벗었다.
너 이 경판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온지 아냐?
모릅니다 스님.
저기 강화도에서부터 머리에 이고 여까지 온 기다. 배도 타고 말도 타고 했겠지마는 내일을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머리에 이고 여기까지 온 거라 말이다.
고려시대 몽골 침입으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던 백성들이 오늘이 아닌 내일을 살기 위해 불심으로 이 무자비한 전쟁을 막기 위해 모두가 이 운반 행렬에 동참했다. 그 불심이 지금까지 팔만대장경을 지키고 있다. 장경판전 안에 직접 들어가니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에어컨이라도 튼 것처럼 서늘한 공기에 팔에는 소름이 돋았고 줄 맞춰 세워진 경판에서는 빛이 났다. 장경판전 안은 그 흔한 벌레 한마리, 거미줄 하나 볼 수 없이 쾌적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만장 아니 팔만장의 경판은 엄청난 중압감을 가져다줬다.
니도 소름 돋제? 장난 아니제? 이제 이 경판을 처음부터 다시 새길 기다. 천년 동안 우리가 이 불심 덕분에 잘 수 있었다면 이제 우리가 그다음 천년을 만들어야 할 차례란 말이다.
이 많은 걸 다시 새긴다고요? 어떻게요? 스리디(3D)프린트 이런 걸로요?
아따 젊긴 젊네. 니는 기계가 편하제? 사람 손으로 다시 새길 기다. 그 힘이 다시 우리를 지켜줄 기다.
숨숨을 해인사에 붙든 건 그날이었을 거다. 구멍 난 발가락 양말을 신은 주지스님과 함께 장경판전을 걸으며 숨숨은 다가올 천년에 대한 원대한 원을 함께 세우고 말았던 거다. 사실 숨숨은 세례까지 받은 기독교 신자다. 세속에서 방송작가 일을 7년 동안이나 한 베테랑 작가다. 한숨 쉬어 갈까, 잠깐 템플스테이나 할 요량으로 해인사에 갔다가 눈 밝은 스님에게 찍혔고 어쩌다 보니 해인사 홍보국 직원이 되어 있더란다.
해인사는 즐길 만큼 즐겼으니 이제 제 계획대로 지중해에 와인 좀 마시러 떠나볼게요, 라고 말할 계획이었던 숨숨은 새로운 천년의 꿈에 매료당해 팔만대장경 복각 사업 홍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순정한 사람 숨숨이 해인사에서 일을 하는 동안 앞으로도 우리는 세속과 탈세간, 과거와 미래, 기술과 인간 사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도 천년의 꿈에 대해 곰곰 생각해볼 것이다. 긴긴 겨울밤, 팔만장의 목판을 새기고 강화도에서 합천까지 그것을 옮긴 천년 전 사람들의 마음을 그려볼 것이다. 절집에서도 세간에서도 천년의 꿈을 다시 세우는 시대에 당신도 나도 살고 있다.
역시나 인생은 내 뒤통수를 친다. 내 손에 와인은 무슨, 지금 내 손에는 백년 됐다는 보이차가 있다. 백년 된 보이차를 마신 대가로 주지스님의 농담을 한시간째 듣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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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종식 그날까지, 다시 빛의 혁명 ▶스토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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