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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역류하는 시간 [이상권의 카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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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이끄는 빈 필하모닉의 브루크너 교향곡 5번이 장대한 피날레를 향해 치달았다. 금관악기의 포효가 정점을 찍고 거대한 화음이 허공으로 흩어진 직후, 지휘자는 팔을 내리지 않았다. 소리는 소멸했으나 음악은 아직 끝나지 않은 그 찰나. 2000여명의 관객이 만들어낸 숨 막히는 정적이 무대 위로 역류하는 듯했다.

귀갓길 차 안에서 틸레만과 빈 필이 2022년에 남긴 같은 곡의 음반을 재생했다. 해석의 윤곽은 익숙했지만 온도는 달랐다. 음반 속 음상은 또렷하고 합주는 매끈했지만, 홀에서 온몸을 죄어오던 부피감과 긴장은 옅어져 있었다. 같은 악보, 같은 연주자인데 왜 다른 경험이 되는 걸까.

11월2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5번 피날레를 끝마친 크리스티안 틸레만과 빈 필하모닉. 한국경제신문 문화전시사업국 제공

11월2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5번 피날레를 끝마친 크리스티안 틸레만과 빈 필하모닉. 한국경제신문 문화전시사업국 제공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라이브 연주가 고조될수록 관객들의 심박과 피부 전도, 몸의 미세한 움직임이 서로 동기화된다고 한다. 공연장의 청중은 의자에 앉은 수동적 수신자가 아니라, 자기 몸으로 파동을 함께 통과시키며 연주에 개입하는 존재다. 옆자리 관객의 긴장이 내게로 전이되고, 그 에너지가 다시 무대로 되돌아가는 순환. 이것이 거실의 스피커가 복제할 수 없는 라이브의 고유한 영역이다.

지난 9월 고베 국제 플루트 콩쿠르에서 이를 다시 확인했다. 본선 무대 객석에서 들은 플루트 소리는 선율이기 이전에 피부를 스치는 바람 그 자체였다. 연주자의 거친 호흡, 관을 타고 흐르는 공기의 진동, 키가 닫힐 때의 둔탁한 마찰음까지. 악보에 없는 이 모든 질감이 하나의 살아 있는 소리를 빚어내고 있었다. 며칠 뒤 유튜브로 다시 본 연주에서 그 거친 결은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었다. 마이크는 음높이와 리듬, 음색까지는 충실히 포착했지만, 객석에서 느낀 공기의 압력까지 옮겨오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녹음이 현장보다 열등한 것은 아니다. 레코딩은 애초에 ‘있는 그대로의 기록’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엔지니어는 객석에서는 들을 수 없는 위치에 마이크를 세우고, 수십 번의 테이크 중 가장 집중된 순간들을 골라 한 작품으로 엮는다. 다이내믹을 다듬고 잔향을 설계한 그 결과물은 실연의 복제품이라기보다, 소리로 다시 빚어낸 또 하나의 미학이다.

이 간극을 이해하는 데는 회화의 비유가 유효하다. 음반을 듣는 일은 스마트폰으로 반 고흐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닮았다. 두 손가락을 벌려 이미지를 확대하면 붓질의 방향과 물감 입자의 농담까지 또렷이 드러난다. 하지만 매끈한 유리 너머에는 결정적인 ‘실재’가 빠져 있다. 캔버스 위로 덧발린 물감의 두꺼운 마티에르(Matière), 붓이 휘몰아친 자리마다 굳어버린 거친 흐름, 그 위로 조명이 비스듬히 떨어지며 생기는 미세한 그림자까지. 고흐의 그림이 화면 속에서는 평면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지만, 미술관에서는 살아 숨 쉬는 유기체가 되는 이유다.


이상권 음악평론가

이상권 음악평론가

미술관에서 원화 앞에 섰을 때 붓 자국이 시각을 넘어 촉각으로 다가오듯, 공연장의 청중은 피부에 와닿는 공기의 파동을 통해 음악의 물성을 느낀다. 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묵직한 울림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옆자리 관객의 숨소리와 긴장이 내 감각에 스며든다. 그 에너지는 다시 무대로 되돌아가는 순환을 그린다. 이는 낯선 이들과 같은 그림 앞에 나란히 섰을 때 느끼는 집단적 공명과 다르지 않다. 녹음이 유리 너머의 선명함이라면, 현장은 물성의 무게이자 타인과 공유하는 시간이다.

둘은 우열의 위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감각을 여는 평행 우주다. 현명한 청취자는 어느 한쪽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거실에서는 음반이 허락하는 미세한 결을 탐색하고, 공연장에서는 아슬아슬한 정적과 집단적 호흡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음악은 하나지만 매체가 바뀌면 표정도 바뀐다. 그 사이를 오가며 비교하고 음미하는 일이야말로 오늘날 음악 애호가에게 주어진 풍요로운 특권일 것이다.

이상권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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