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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파 못 살겠다" 핏발 선 광부들, 군인은 칼 꽂은 총구를 들이댔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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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과 검열]④ 차단된 민생 정보
콜레라 '최초 전파자'?...알고 보니 그도 피해자
침묵하는 언론, 분노한 광부들 "기자가 왜 왔소"
'태극기 연설'로 마음 연 기자...광주에도 전해져
끝내 사망소식 못 전한 선원3명...아직 사모아에

편집자주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지난해 12월 3일 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 포고령 제3항은 권력이 언론을 암전한 45여 년 전의 악몽을 떠오르게 했다. 역사는 돌고 돌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격언을 상기시킨다. 독재 권력이 등장할 때, 가장 먼저 장악하려는 것이 언론이며 언론인은 독재자의 탄압과 가해를 가장 혹독히 겪는 직업군이다. 한국일보는 12·3 불법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1980년 전후 권력이 지운 352개의 기사를 발굴해 뒤늦게 독자들께 배달하면서, 비록 기사를 신문에 싣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취재하고 처절하게 맞섰던 당시 본보 기자들의 증언을 모으고 기록했다.


문창재(오른쪽 두번째) 한국일보 기자가 1980년 4월 강원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 현장에서 광부들의 노동환경을 취재하고 있다. 광부들이 월급봉투를 꺼내들고 와서 열악한 처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문창재(오른쪽 두번째) 한국일보 기자가 1980년 4월 강원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 현장에서 광부들의 노동환경을 취재하고 있다. 광부들이 월급봉투를 꺼내들고 와서 열악한 처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견습기자로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을 겪고 전남 목포 주재기자로 발령 난 한국일보 신참 유동성(당시 24세)에게 그해 9월, 또 다른 불길한 소문이 전해졌다. 석간 J일보 선배가 이런 말을 전했다. "전염병이 돈다대."

그들의 귀에 들어온 건 신안 섬에서의 괴질 사망 소식. 목포에서 뱃길로 1시간 거리인 신안군 안좌도, 이 섬의 두리 마을에 사는 장귀섭(68)이 그 당사자였다.

8월 31일 전날 밤부터 귀섭에게 시작된 설사는 멎지 않았다. 새벽부턴 오장육부를 뽑아내는 듯한 구토도 시작됐다. 수분이 빠져나가 피골이 상접했고, 피부는 푸르다 못해 검게 변해갔다. 경련도 심해져 이웃 주민들이 달려와 그의 사지를 주물렀지만 차도는 없었다.

전남 신안군 안좌면에서 한복 차림의 여성이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담벼락을 지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전남 신안군 안좌면에서 한복 차림의 여성이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담벼락을 지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인구 230명 남짓, 신안에서도 작은 마을인 두리에는 귀섭의 상태를 진단해줄 사람이 없었다. 가족도, 이웃도,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네 약방 젊은이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들은 소싯적에 만주를 돌아다녀 비교적 식견이 넓었고, 이름인지 별명인지 '만수'라고 불리던 노인을 반강제로 끌고 왔다. "만주에서 수없이 봤던 전형적인 콜레라 환자의 몰골 같다"고 만수 노인은 말했다.

9월 1일 뒤늦게 꽂은 1리터(L)짜리 수액이 채 반도 투입되기 전에 귀섭의 숨은 끊어졌다.(①)

그래픽=김대훈 기자

그래픽=김대훈 기자


"콜레라냐" 물어도 답변 안 했다



1971년 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전남 신안군 안좌면 부둣가에 현수막이 붙어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1년 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전남 신안군 안좌면 부둣가에 현수막이 붙어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동성은 9월 10일 J일보 선배와 함께 당시 목포 시내에 있던 신안군청 행정계 사무실에서 ‘동향보고’라고 적힌 서류 뭉치를 발견했다. ‘신안’ ‘안좌면’ ‘괴질’ ‘3명 사망’ 같은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동성은 망설였지만, 선배는 잽싸게 서류를 들고 일어섰다. 둘은 이 서류를 공유했다. 당시 석간 J일보와 조간 한국일보는 경쟁 관계라기보다, 협력 관계에 가까웠던 터.

다른 조간신문에서도 낌새를 포착할까 서둘러 안좌면사무소에 확인 전화를 걸었다. 돌아온 건 “맞다”는 대답. 우선 내일 자 기사를 써야 했다. ‘신안 3개 부락에 괴질이 번져 3명이 숨졌다.’ 9월 11일 자 한국일보 6면 기사를 통해 호남을 할퀸 콜레라의 진상은 처음 보도됐다.

신안군에 '괴질'이 집단 발병해 3명이 사망했다는 1980년 9월 11일 한국일보 6면 기사.

신안군에 '괴질'이 집단 발병해 3명이 사망했다는 1980년 9월 11일 한국일보 6면 기사.

그러나 동성이 끝내 직접 확인할 수 없었던 건 '괴질'의 정체였다. 마을 노인에 이르기까지 유행병이 콜레라 같다는 심증은 갖고 있었지만, 아무리 "콜레라가 맞냐"고 물어도 방역 당국은 묵묵부답이었다. 콜레라 대신 '유행성 설사병' 같은 단어가 지면에 등장했다.


유동성 전 한국일보 기자가 11월 25일 전북 전주시의 한 스튜디오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왼쪽은 유 전 기자의 젊은 시절 모습. 전주=민경석 기자

유동성 전 한국일보 기자가 11월 25일 전북 전주시의 한 스튜디오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왼쪽은 유 전 기자의 젊은 시절 모습. 전주=민경석 기자


전염병은 쉬쉬, 보건 관리 비판 기사는 삭제


R씨는 보사부 산하 연구기관 소속으로 당시 현장에 파견됐다. 그는 "8월 중순 전남도청으로 파견돼 검체 분석을 도와주는 일을 했다"며 "먼저 파견된 인사들은 7월 말에서 8월 초쯤에 전남으로 갔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뒤늦게 서울에서 내려온 역학조사팀을 귀섭의 집에 데리고 간 것도 R씨였다.

즉 이미 당국은 콜레라 확산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 개연성이 크다. 그러나 신군부의 선택은 콜레라의 존재를 알리고, 국민 보건을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전염병 존재에 대한 보도를 통제하는 것이었다.(②)

그래픽=김대훈 기자

그래픽=김대훈 기자


방역 당국이 귀섭의 사망 후 6일 만에야 현지의 우물을 소독했다고 지적한 동성의 기사는 검열단에 의해 삭제됐다. 동성은 "정부가 잘못해서 콜레라가 퍼졌다는 식으로 해석이 되니 막았을 것"이라고 했다. 힘들여 취재하고도 보도할 수 없었던 헛고생이 기자들의 일상이었다.

광부들 설득해 취재, 죄인된 기자의 심정


80년 4월 22일, 서울 중학동 한국일보 편집국 칠판엔 ‘광산노조(강원도 지역 3백여 명) 경찰과 충돌 불가’라는 보도지침이 적혀있었다.

그런데 웬일일까. 강원 정선군 사북읍에 급파된 한국일보 기자 박정수가 쓴 사북 취재기는 25일 자 신문에 자세히 실렸고, 이후 문창재가 쓴 사북 광부들의 노동현실 특집기사들이 실렸다. 당시 취재기자들이 세상을 떠나 이 기사가 삭제되지 않은 배경은 확인이 되지 않는다. 다만 그해 한국일보 초년 기자였던 김주언(당시 26세)이 4월 입사 당시 "언론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시기에 들어왔으니 운 좋은 줄 알아라"는 얘기를 선배들에게 들었던 점을 미루어보면, '서울의 봄' 속 검열에 잠시 빈틈이 생긴 순간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물론 전두환 측이 저지른 내란이었던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로 이런 기대는 곧 무너졌다.


1980년 4월 25일 한국일보 6면에 실린 박정수 기자의 사북 사건 취재기.

1980년 4월 25일 한국일보 6면에 실린 박정수 기자의 사북 사건 취재기.


정수의 취재기에 실린 내용은 생생하다. 기차역 앞 꺼져가는 모닥불엔 푸른 작업복 차림의 광부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광부처럼 보이지 않는 정수에게 다가왔다. 기자라며 상황을 묻는 정수에게 이들은 "신문 보도도 안 하는데 기자가 뭣 하러 찾아왔소", "당신은 업주 편 이야기만 들어온 기자 아니요?"라고 따졌다. 이틀간 계속된 집회로 광부들의 눈엔 붉은 핏줄이 선했다.

1980년 4월 23일 강원 정선군 사북읍의 광업소 정문을 광부들이 지키고 있다. '증산보국', '노사협조증진강조기간' 등의 글씨가 정문에 적혀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0년 4월 23일 강원 정선군 사북읍의 광업소 정문을 광부들이 지키고 있다. '증산보국', '노사협조증진강조기간' 등의 글씨가 정문에 적혀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착취하는 회사, 협조하는 당시 어용노조 지부장에 대한 분노가 겹쳐 폭발하면서, 21일부터 사북의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됐다. 회사뿐 아니라 광부들의 집회를 불허한 경찰서까지 폐허가 됐다.(③)


그래픽=김대훈 기자

그래픽=김대훈 기자


정수는 전쟁터 같은 현장을 지나 광부들을 따라 광업소 광장으로 들어갔다. 3,000명은 되어 보이는 광부들이 모여있었다. 곧 "회사의 앞잡이다", "찍어버려라"는 고함이 쏟아졌다.

자신도 광부들과 같은 인간이라고,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광장 부근에 걸린 태극기가 눈에 들어왔다. 정수가 외쳤다.

"여러분 내가 사북지서를 갔을 때도 건물 안은 박살이 났으나 그 위의 태극기만은 지금처럼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들과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들어왔습니다."

광장은 점차 잠잠해졌다.

이원갑 사북민주항쟁동지회 명예회장이 11월 17일 경기 부천시 자택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며 탄광 작업복 차림의 과거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민경석 기자

이원갑 사북민주항쟁동지회 명예회장이 11월 17일 경기 부천시 자택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며 탄광 작업복 차림의 과거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민경석 기자


이윽고 정수의 보도증을 확인한 청년이 "한국일보 기자가 틀림없다"고 외쳤다. 그제야 야유는 "배고파서 못 살겠다"는 외침으로 바뀌었다. 이 취재기는 검열의 시대에 드물게 신문에 실려 처절했던 사북의 현장을 오늘까지 전하고 있다. 침묵하는 언론에 대한 우회적인 지적도 광부의 목소리로 세상에 알려졌다.

1980년 4월 24일 강원 정선군 사북읍에 걸린 태극기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0년 4월 24일 강원 정선군 사북읍에 걸린 태극기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공수부대 맞선 광부들, 광주처럼 지워져


정수는 운 좋게도 현장에 당도한 첫날 쓴 기사를 내보낼 수 있었지만, 신군부 검열단은 사북 사건 보도를 치밀하게 관리했다. 특히 예외적으로 허용했던 보도 가운데에서도 계엄군 투입 관련 소식은 삭제했다.

회사와 어용노조에 맞서 광부들을 이끌었던 이원갑(현재 85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광부들이 소리를 지르면 허공에 사라져서 하나 마나 하는 얘기가 된다."

1980년 4월 24일 강원 정선군 사북읍 라이온스클럽 앞에 진압 장비를 착용한 기동경찰들이 모여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0년 4월 24일 강원 정선군 사북읍 라이온스클럽 앞에 진압 장비를 착용한 기동경찰들이 모여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마찬가지로 광부였던 원갑의 아버지, 할아버지 대부터 이런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광부들은 “돈 없고 못 배우고 빽 없는 사람, 올 데 갈 데 없는 사람”(이원갑)이라고 자조했다.

한국일보 지면엔 본보 기자가 찍지도 않은 사진이 실렸다. 광부들이 어용노조 지부장 이재기의 부인을 붙잡아 묶어둔 사진은 일제히 조간신문 1면에 실렸다. 신아일보 기자가 22일 혼자 찍은 이 사진이 어떻게 단독으로 쓰이지 않고 다른 신문에도 풀렸는지는 규명되지 않았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그래픽=신동준 기자


당시 사북 임시취재반의 일원이었던 한국일보 기자 고 문창재는 “특별히 친한 기자들끼리 사진을 공유하는 게 아니라, 모든 신문이 같은 사진을 쓰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며 "그 사진이 전 신문에 나고 사북 사태의 상징처럼 여겨진 데에는 ‘검은 손’이 작용하지 않았나"(다큐 ‘사북’ 박봉남 감독과의 2020년 인터뷰)라고 말했다. 원갑은 이런 보도가 "사북 사건은 폭동이고 난동이라고 몰아붙이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원갑은 23일 오후 1시쯤 사북 읍내를 지나고 있었다. 사복 차림의 남성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가 들려준 건 "오늘 자정 공수부대가 투입되니까 그렇게 아세요"라는 말. 원갑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다. 원갑은 경찰과 예비군 무기고, 다이너마이트가 있는 광업소 화약고에 사람을 배치하곤 "지시가 있기 전까진 절대 뜯지 마라. 단, 공수부대가 투입되거든 무조건 뜯고 대항하라"는 지시를 남겼다.(④)


그래픽=김대훈 기자

그래픽=김대훈 기자


합의는 시늉일 뿐이었다. 국가는 이후 광주를 짓밟았던 방식 그대로 원갑과 광부들을 짓밟았다.

5월 6일 원갑을 비롯한 파업 주동자들은 "논의할 게 있다"는 연락을 받고 사북 읍사무소 회의실로 갔다. 자리에 앉자 회의실 양쪽 문에서는 M16 소총에 칼까지 꽂은 계엄군들이 튀어나왔다. "불법 집회로 전원 체포한다." 군인들은 원갑과 광부들을 군홧발로 짓밟아 압송했다.

이원갑 사북민주항쟁동지회 명예회장이 11월 17일 경기 부천시 자택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민경석 기자

이원갑 사북민주항쟁동지회 명예회장이 11월 17일 경기 부천시 자택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민경석 기자


이들은 같은 달 29일 군 검찰에 송치되기까지 지옥과 같은 고문을 견뎌야 했지만, 한국일보는 검열로 인해 6일의 체포 소식부터 보도할 수 없었다.

제대로 보도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정수를 비롯한 기자들은 왜 사북에 갔을까. 박정수, 문창재를 포함해 당시 한국일보 임시취재반 구성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 물을 수는 없지만, 박정수의 '태극기 연설' 취재기는 후배들에게 전해졌다.

동성은 "선배가 '누군가는 진실을 알고 기록해서 언젠가는 알려야 할 것 아니냐'는 외침에 시민들에게서 풀려나 취재했다는 얘기를 듣고, 광주를 취재하면서도 시민들을 그렇게 설득했다"고 말한다.

문창재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이 2023년 1월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문창재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이 2023년 1월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지금 보도할 수는 없더라도 언젠가 꼭 보도하겠다는 포기할 수 없는 기자 정신이었다. 첫 며칠간 많게는 5개 면씩 특집으로 기사를 내보낼 수 있었던 것도, 검열에 지레 겁먹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다큐멘터리 '1980 사북'의 감독 박봉남은 "박정수는 4월 23일의 상황을 가장 자세히 묘사한 기자였고, 문창재는 이후 열악한 노동조건을 6회의 연속 기사로 전해 광부들에 온정적인 여론이 만들어지는 데 영향을 줬다"며 "한국일보가 다른 신문보다 돋보이는 내용들을 많이 썼다"고 평가했다.

박정수보다 하루 늦게 사북에 도착한 문창재는 사건이 일단락된 이후에도 4, 5일간 현장에 머물며 광부들의 생활상과 열악한 처우를 취재한다. 사진은 당시 한국일보에 6회에 걸쳐 연재된 '광산지대 그 실상을 벗긴다'는 분석기사 마지막 회. 5번의 시리즈 기사를 담당한 문창재는 '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라고 물어보니 우호적으로 취재에 응해줬다고 회상했다(박봉남 감독과의 생전 인터뷰 중).

박정수보다 하루 늦게 사북에 도착한 문창재는 사건이 일단락된 이후에도 4, 5일간 현장에 머물며 광부들의 생활상과 열악한 처우를 취재한다. 사진은 당시 한국일보에 6회에 걸쳐 연재된 '광산지대 그 실상을 벗긴다'는 분석기사 마지막 회. 5번의 시리즈 기사를 담당한 문창재는 '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라고 물어보니 우호적으로 취재에 응해줬다고 회상했다(박봉남 감독과의 생전 인터뷰 중).


노동자 해고 기사는 미담 기사가 됐다


1980년 2월 14일 자 한국일보 7면에 양말을 팔아 해고된 동료를 돕는 ‘한국전자캐비닛 생산과장’ 출신 전근식(당시 35세)씨의 사연이 실렸다. 근식은 차비가 없어 고향 강원도로 가지 못하는 동료, 교통사고로 부인이 죽었는데 장례도 못 치르는 동료를 생각해 풀포기라도 잡고자 했다.

1980년 2월 14일 자 한국일보 7면에 마산수출자유지역에서 양말을 팔아 동료들을 도우려는 한국전자캐비닛 전 직원들의 사연이 소개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0년 2월 14일 자 한국일보 7면에 마산수출자유지역에서 양말을 팔아 동료들을 도우려는 한국전자캐비닛 전 직원들의 사연이 소개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당시 한국일보 경제부 기자였던 김영호는 그 시절 경기에 관해 "국제 경기 침체 속에서 한국에서 저임금을 따먹고 살던 제조업체들은 더 임금이 낮은 국가로 옮겨 가던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박정희 정권은 낮은 임금을 싼 곡가로 유지해왔는데 (저임금 저곡가 정책), 오일쇼크 등으로 물가가 치솟으면서 노동자들의 불만은 커졌지만 언론은 이를 제대로 보도할 수 없었다.

영호는 "그런데도 군부는 물가, 요금과 관련해 인상이라는 표현은 못 쓰게 했고 '현실화', '가격 조정' 같은 단어를 쓰게 했다"고 했다.

김영호 전 한국일보 기자가 11월 21일 본보와 인터뷰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오른쪽). 왼쪽 사진은 한국일보 기자로 일하던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 민경석 기자

김영호 전 한국일보 기자가 11월 21일 본보와 인터뷰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오른쪽). 왼쪽 사진은 한국일보 기자로 일하던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 민경석 기자


2월에 근식의 이야기를 취재해서 쓴 한국일보 마산 주재 기자 김용복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근식의 이야기는 1월 용복이 취재한 기사의 후속보도였다. "3만여 근로자가 일하고 있지만 아직 노조가 결성된 곳은 한 곳도 없다." 용복은 공단의 현실 기사에서 '노조부재 현상'라 이름 붙였다.(⑤)

그래픽=김대훈 기자

그래픽=김대훈 기자


그러나 미담이 아닌 이 기사는 전면 삭제됐다. 검열단은 '근로자를 선동할 우려'를 들었다. 당사자인 용복에게 누구도 상황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용복은 "그때 기사가 잘려나갔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데스크가 안 내보냈거나 판을 교체하며 빠진 줄 알았다"고 말했다.

"5개 폐업 회사가 700여 명에게 2억여 원을 체불하고 있다." 지워진 기사 속 용복의 문장이 가리키는 건 폐업과 해고로 뿌리째 흔들린 공단 노동자들의 삶이었다. 신군부는 이들의 살고 싶다는 절규도 기사와 함께 삭제했다.(⑥)

그래픽=김대훈 기자

그래픽=김대훈 기자


"야간조로 밤새 일하고 초췌한 몰골로 퇴근하는 아침시간이면 교복 차림의 여공들이 수업을 듣기 위해 공장에서 쏟아져 나왔어요."

1980년 열아홉의 나이로 수출자유지역의 금속 가공 업체에서 일했던 박영주(마산·창원 지역 역사연구자)는 회상한다. 당시 여공들은 하루 8시간 3교대의 작업을 하고서 저녁이 되면 교복으로 갈아입고 공단에 마련된 '산업체 특별학급'에서 고등학교 수업을 들으러 갔다.

계엄사의 언론검열로 언론이 노동현실을 담지 못하면서, 노동자들은 정보와 교육과 자신을 지지해주는 이들에 목말랐다. 1980년부터 마산 YMCA 간사로 수출자유지역에서 활동하며 여공들의 공부모임을 조직한 정혜란은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홍보 전단을 만들어서 공단에 가면 순식간에 없어지곤 했다"고 회상한다.

1989년 12월 21일 마산 수출자유지역 내에 위치한 한국TC전자에서 회사 폐업에 항의하며 9개월째 점거농성을 벌인 노동자가 경찰에 의해 끌려 나오고 있다. TC전자는 미국인이 전액 출자해 1972년 설립된 회사로, 회사는 노조와 단체협상이 결렬된 이후 수출 경쟁력을 상실해 더 가동할 수 없다고 폐업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9년 12월 21일 마산 수출자유지역 내에 위치한 한국TC전자에서 회사 폐업에 항의하며 9개월째 점거농성을 벌인 노동자가 경찰에 의해 끌려 나오고 있다. TC전자는 미국인이 전액 출자해 1972년 설립된 회사로, 회사는 노조와 단체협상이 결렬된 이후 수출 경쟁력을 상실해 더 가동할 수 없다고 폐업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원양선원들의 죽음을 알릴 수 없었다


11월 10일 한국일보 본사로 호소문이 하나 도착했다. 발신지는 한국에서 8,700㎞ 떨어진 미국령 사모아.

그곳에 억류된 한국인 원양선원들이 하루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도와달라는 게 내용이었다. 이들의 사연은 이튿날 한국일보에 실렸으나, 가장 중요한 대목은 삭제됐다. 3명의 선원이 현지에서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⑦)

그래픽=김대훈 기자

그래픽=김대훈 기자


"9월 계약만료 이후 바로 귀국시켜줬어도 남편이 숨지진 않았을 것"이란 유가족의 인터뷰도, "눈물겨운 장례식을 치른 후 더욱 불안과 초조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선원들의 호소도 삭제됐다.

1980년 11월 12일 자 한국일보 6면에 보도된 선원 가족(아래)들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0년 11월 12일 자 한국일보 6면에 보도된 선원 가족(아래)들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화영, 강사랑, 박성득. 죽었다는 소식조차 세상에 알려질 수 없었던 세 선원은, 유해로도 끝내 가족과 만나지 못했다. 해양수산부는 2014년부터 가족의 신청을 받아 사모아의 한국인 선원 묘지를 국내로 이장하고 있는데, 이들의 유해는 여전히 사모아에 남아 남태평양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사모아 현지에 있는 한국인 선원들의 묘지. 해양수산부 제공

사모아 현지에 있는 한국인 선원들의 묘지. 해양수산부 제공


기자들이 취재한 내용을 보도하는 '상식적인' 언론이랄 게 없었던 1980년 계엄 치하의 세상에서 현재의 한국은 무엇을 배워야 할까. 검열로 삭제된 한국일보 기사 352건을 본보에 전한 이민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권력과 긴장관계를 가지고 대중의 편에서 진실한 정보를 전해야 하는 언론에도 책임이 있다. 진실을 은폐하는 순간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5회/ 이민규 교수의 인터뷰로 이어집니다>

목차별로 읽어보세요

  1. ① 46년 만의 보도
    1. • 46년 전 겨울 내란의 밤, 이제야 그 기사를 배달합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314400001938)
    2. • 46년 전 계엄 때 삭제된 기사 352개, 어떻게 입수했나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916320001408)
    3. • "탕탕탕···" 밤새 취재한 '쿠데타의 밤' 기사 지워지고, 검열 지옥이 열렸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1914530005155)
    4. • "박정희, 서울에 발포 명령 계획" 김재규 최후진술 보도, 전두환의 가위질로 삭제됐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720520001460)
  2. ② 해고, 농성, 고문
    1. • "고문 기술자가 미안해 할 정도로 모진 고문" 전두환 '왕' 만들기에 1000명 넘게 스러졌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1909450005795)
    2. • 간첩 잡던 군인이 언론인 때려 잡았다…감금한 채 "각서에 지장 찍어라"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422270000884)
    3. • "눈물 젖은 신문" "계엄해제 만세!" 꼿꼿했던 만평··· 삭제 45년 만에 전합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3015350001829)
    4. • "공산주의 국가나 언론통폐합" 부인하던 신군부, 두 달 뒤 현실됐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514510000555)
    5. • 5·18 삭제 기사로 되살려낸, 가상의 '한국일보 1980년 5월 신문'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20216210004715)
  3. ③ 광주로 간 기자들
    1. • 귓가에 계엄군 총알이 스쳤다… "여기서 같이 죽자" 광주로 간 기자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015050001117)
    2. • "금희야" 억장 무너지는 시신 가매장 현장··· 45년 만에 찾은 진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416220004714)
  4. ④ 차단된 민생 정보
    1. • 콜레라로 사람 죽었는데 '은폐'…역사에서 삭제한 '또다른 학살'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323100005417)
    2. • "배고파 못 살겠다" 핏발 선 광부들, 군인은 칼 꽂은 총구를 들이댔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1917220005660)


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최은서 기자 silver@hankookilbo.com
유대근 기자 dynamic@hankookilbo.com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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