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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겨울’을 되찾으며 [서울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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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8일 태안의 한 전통시장에서 지역 예술가들이 시장 상인들을 만나 기록한 이야기와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다. 유재혁 제공

지난 11월8일 태안의 한 전통시장에서 지역 예술가들이 시장 상인들을 만나 기록한 이야기와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다. 유재혁 제공




하명희 | 소설가



한해의 끝자락이다. 올해 첫날에는 집에서 가까운 바다에서 해맞이하려고 새벽에 태안 어은돌로 갔었다. 옆 동네 친구의 작은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 해가 나오길 기다렸으나 먹구름이 넓게 퍼져 일출을 보는 건 포기했다. 대신 뭍으로 나와 슬로프에 올라선 작은 배를 보았다. 한쪽이 들어 올려진 배 아래로 선장인 듯한 노인이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 배 밑바닥의 따개비를 긁어내고 있었다.



새해 첫날, 한해 바다로 나갈 배의 밑바닥을 닦는 일, 그것은 내가 본 어떤 일출 장면보다 장엄하고 지극했다. 12·3 계엄을 시작으로 겨울을 송두리째 도둑맞은 기분이었는데 배 밑바닥을 닦는 어부의 태도는 한해를 시작하는 푯대가 되기에 충분했다.



날이 풀리자 지난해 데려온 병아리들이 닭이 되어 첫 알을 낳기 시작했고, 헌법재판소의 주문이 선고되었다. 탄핵이 선고된 뒤 텃밭에 감자를 심었다. 지난해 시기를 놓쳐 심지 못한 나무들도 심었다. 안개나무, 거향수나무, 목련, 자두나무, 무화과, 진달래, 동백, 명자나무, 보리수나무…. 나무 아래에는 섬진강 둘레에서 시인이 보내준 채송화씨를 뿌렸다. 시인은 전국에 채송화씨를 보내며 일명 ‘채송화당’ 당원이 될 것을 주문했다. 나는 기꺼이 채송화당에 가입했고 당원이 되었다.



대관령에 사는 소설가이자 정원사가 보내준 유럽봄맞이꽃도 눈송이처럼 하얗게 터지기 시작했다. 천리포수목원에서 받아 겨우내 숨어 있던 튤립도 하나둘 흙을 뚫고 나오더니 앞다퉈 수선화가, 수레국화가, 장미가 터지고 씨를 뿌린 채송화가 피었다. 전국의 채송화당 당원들이 시인에게 꽃이 피었음을 알렸다. 그즈음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감자를 캤다.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주문과 함께 심은 감자는 씨감자 한알에 일고여덟개의 튼실한 감자를 키워냈다.



여름이 시작되고 태안의 예술가들을 만났다. 오랜 시간 신두리 사구의 바람과 모래를 기록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한테 태안 전통시장을 살리는 도시재생사업에 참여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함께할 수 있는 예술가들을 만나 도시재생 교육을 받고 다른 도시로 견학을 가기도 했다. 시인과 사진가, 수필가와 소설가로 꾸려진 우리 팀은 시장 상인들의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담아내는 아카이빙 작업을 진행했다.



1972년부터 시어머니가 하던 포목상을 이어받아 주단과 한복을 파는 상인, 1980년에 문을 연 오래된 철물점, 집안에 애경사가 있으면 그릇을 빌려주고 돈을 받는 ‘세 그릇’ 장사를 했다는 분, 30년 내공으로 적당한 염도를 자랑하는 우럭 포 가게, 콩 농사를 지어 콩국수를 파는 분식점, 40년 동안 제철 생선을 말려서 파는 좌판 상인, 어머니 때부터 시작해 서부발전소에서 2교대로 근무하며 점포를 운영하는 아들까지 70년 동안 3대째 젓갈을 파는 가게, 35년 동안 호떡을 구우며 자식과 손주까지 열명을 키웠다는 호떡집, 3월에 대파, 상추로 시작해 고추, 오이, 참외 모종을 팔다가 고추, 배추 다 내보내고 11월에 양파 모종이 나가면 1년을 보낸다는 모종 가게 상인을 만나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어 공동체 축제에서 전시했다.



전통시장 한쪽에서 전시 준비를 하며 이젤을 세우고 있을 때 한 할아버지가 말을 걸까 말까 하다가 물었다. “저 지게로 뭐하는 거여?” 이젤에 사진과 인터뷰 글을 올려놓으니 할아버지가 씽긋 웃었다. 여름부터 시작된 우리의 작업이 겨울철 땔감처럼 보였을까. 전시에 온 분들은 자신의 이야기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틈나는 대로 와서 둘러보고 가곤 했다. 시장을 찾은 발길도 그곳 한편에서 한 생을 보낸 상인들의 이야기와 사진을 보며 한참을 머물렀다. 다시 12월, 이곳에서 보내는 두번째 겨울이다. 지난해 잃어버린 겨울 들판에 눈이 오고 기러기들이 돌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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