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불패'가 그린 청사진... "한화도, 김서현도 이제 시작... 내년·후년에도 우승 도전할 것" [K스포츠 레전드 열전]

<22> 한화의 레전드 구대성

편집자주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스포츠 스타들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 종목을 막론하고 대한민국 스포츠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찍어낸 전설들의 화려했던 전성기 시절과 현재의 삶을 조명하고 은퇴 후 제2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자신만의 건강 관리법 등을 함께 들어봅니다.

한화의 레전드 '대성불패' 구대성이 최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글러브를 낀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예진 기자

"아쉽긴 하지만 미래를 봤어요. 이제 시작이죠."(웃음)

프로야구 한화의 레전드 구대성(56)이 미소 속에 아쉬움을 감췄다. 친정팀이 2025 KBO리그 한국시리즈에서 LG에 시리즈 전적 1승 4패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는 패배보단 ‘경험’에 방점을 찍었다. 구대성은 "시리즈 내용이 좋았던 건 아니지만, 19년 만에 오른 한국시리즈에서 한 번이라도 승리했다는 게 중요하다"며 "내년, 내후년에도 꾸준히 정상을 넘보는 팀이 되도록 선수들과 팬들이 모두 힘을 내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26년 전 한화 우승 당시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던 '대성불패' 구대성을 최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떡잎부터 달랐던 원조 '일본 킬러'

한양대 재학 시절 역투하는 구대성. 한국일보 자료사진

현실의 아쉬움을 매만지기보다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는 그의 성향은 타고난 기질이다. 야구공을 처음 잡았을 때도 그랬다. 대전 신흥초 3학년 때 친형(구대진)을 따라 야구부에 들어가려 했지만, ‘4학년부터 입회가 가능’한 학교 방침상 정식 팀원으로 뛸 수 없었다. 더군다나 부모님도 아들 둘 모두가 운동을 하는 데 난색을 표했다. 그럼에도 구대성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3학년 때 캐치볼을 하면서 1년을 기다렸다"며 "부모님의 반대에는 '집을 나가겠다'는 으름장으로 맞서며 어렵게 야구를 시작했다"고 회상하며 웃었다.

정식으로 투수 마운드에 오르기까지는 또다시 1년이 걸렸다. 구대성은 "처음에는 투수와 야수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포지션을 다 소화했는데, 5학년 때 감독님이 모든 선수들을 불러놓고 돌아가면서 투수를 시켰다"며 "그때 내가 체인지업을 던지는 걸 보고 감독님이 '너 투수하자'고 하셔서 쭉 마운드에 설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떡잎부터 달랐던 구대성은 그야말로 아마추어 무대를 평정했다. 대전고 2학년이었던 1987년 팀 에이스로 청룡기 우승을 일궜고, 한양대 진학 후에는 모교의 전성기를 주도했다. 국제대회에서도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대학 1학년 때인 1989년 국제야구연맹(IBA) 대회에서 미국전 완봉승을 거둔 데 이어, 불과 이틀 뒤 일본전에도 선발로 나서 10이닝 1실점 완투승을 따냈다. 이때부터 그에겐 '일본 킬러' '국제용 투수'라는 별명도 따라붙었다.

혹사 후유증 딛고 맞은 전성기

1993년 빙그레 1차 지명으로 프로에 입문한 구대성.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러나 빛이 강했던 만큼 그림자도 짙었다. 몸을 사리지 않은 등판 탓에 후유증이 찾아왔다. 구대성은 "아마추어 시절 춘천에서 경기 중 팔꿈치를 다쳤는데, 그 후로 직구 구속이 시속 6㎞ 정도 줄었다"며 "이후에도 한동안 통증을 안고 공을 던졌다"고 밝혔다. 프로 입단 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루키 시즌이었던 1993년 혹사 후유증으로 시즌 중반까지 ‘개점휴업’ 상태였다. 결국 6경기에 나서 2승(1패)에 그쳤다. 1차 지명을 받은 유망주라기엔 초라한 성적이었다.

그럼에도 구대성은 ‘혹사’라는 표현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다 그렇게 운동하던 시절이었다"며 "그때 열심히 던졌기에 한양대가 우승도 많이 했고, 나 개인적으로도 좋은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지금도 혹사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당시 겪은 어려움은 오히려 그의 긍정 마인드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구대성은 "주위에선 '이제 다 끝났다'고도 했지만, 좋은 트레이너 선생님들을 만나 재활에 성공했다"며 "이후 몸이 아플 때마다 당시를 생각하며 '다시 재활하면 되지'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구대성이 최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과거 혹사 논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예진 기자

재활에 성공한 뒤 그는 본격적인 전성기를 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시즌은 1996년이다. 당시 구대성은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전천후’ 투수로 활약하며 18승(3패) 24세이브를 기록, 다승왕과 세이브왕을 동시에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투수 분업이 확실해진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활약이다. 구대성은 "당시에도 혹사 논란이 있었지만, 내게는 그저 영광스러운 기록"이라며 "(송)진우형과 보직을 맞바꿔가면서 던지던 하루하루가 정말 재미있었다"고 웃었다.

그가 남긴 대기록은 또 있다. 구대성은 1999년 한국시리즈 다섯 경기에 모두 등판해 1승 1패 3세이브를 기록, 마무리 투수 중 유일무이하게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됐다. 프로야구 출범 44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불펜투수로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 선수는 구대성 외에는 없다. 그는 "당시 야수들이 너무 잘해줘서 (내 수상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다섯 경기에 전부 던졌다는 걸 높게 봐주신 것 같다"며 웃었다.

끝없는 해외 도전... '영구결번' 미지정은 아쉬움

구대성이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유니폼을 입고 역투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 무대를 평정한 그는 곧 해외로 눈을 돌렸다. 2001년 일본 프로야구(NPB) 오릭스로 이적해 이듬해 퍼시픽리그 평균자책점 2위에 오르며 존재감을 드러냈고, 2005년에는 미국 메이저리그(MLB) 뉴욕 메츠 유니폼도 입었다. 훗날 호주리그(ABL)까지 진출하면서 한국 선수 최초로 한·미·일·호주 프로리그를 모두 경험한 투수라는 진기록도 세웠다. 그는 "그냥 계속 도전하고 싶었다"며 "특히 호주리그를 갈 때는 '야구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 하나뿐이었다"고 했다. 이어 "호주리그가 종료되면 현지 사회인야구 리그에 가서 또 시합을 뛸 정도였다"며 "한국 나이로 45~46세 정도 되니까 몸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허리에 주사를 맞아가면서 마운드를 지켰다”고 웃었다. 그 열정은 은퇴 이후에도 식지 않았다. 그는 2018~19시즌, 2022~23시즌 다시 마운드에 올라 변하지 않은 야구 열정을 보여줬다.

한국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구대성이지만, 의외로 그의 등번호(15번)는 한화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구대성이 신인 유창식에게 등번호를 물려준 것’으로 보도됐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구대성은 "(2010년 열린) 은퇴식에서 구단이 내가 자의로 번호를 양보한 것처럼 발표해버렸다"며 "그 상황에서 내가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하기도 애매해 그냥 영구결번을 포기했다"고 털어놨다. 이어 "나는 호주에서 현역생활을 이어갈 계획이었기에 애초에 은퇴식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며 "그럼에도 구단이 '(은퇴식을 안 열 경우) 곤란해진다'고 부탁해 은퇴식에 참석했는데, 예상치 못한 발표가 나와 개인적으로도 당황스러웠다"고 돌아봤다.

구대성이 2010년 9월 3일 대전 한밭 야구장에서 열린 자신의 은퇴식 도중 마운드에 키스를 하고 있다. 대전=연합뉴스

그렇다고 친정팀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건 아니다. 구대성은 "여전히 한화에서 후배들을 가르쳐 보고 싶다"고 말했다. 한용덕 감독 시절(2018~20) 투수코치 제안이 온 적도 있었다. 그는 "당시 호주 15세 이하 국가대표팀에서 어린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눈에 밟혀서 고사했다"며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가자'고 다짐했는데, 아직 적당한 기회가 안 왔다"며 웃었다.

'대성불패'의 식지 않는 '야구 열정'

직접 한화 후배들을 지도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후배 한 명 한 명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살피고 있다. 예를 들어 "문동주 정도면 15승 이상을 올려야 한다"면서 "지금은 공에 무게가 떨어진다. 손가락 끝으로 공을 누르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외에도 "황준서가 선발로 자리를 잡아줘야 한다"거나 "엄상백은 애초에 코너가 아닌 가운데를 보고 던지는 투수다. 볼 배합을 바꿔야 한다"며 한화 마운드를 꼼꼼하게 분석했다.

구대성이 최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한화 후배들을 꼼꼼하게 분석하고 있다. 강예진 기자

마무리 계보를 잇는 김서현에 대한 평가도 궁금했다. 김서현은 올해 정규시즌에서 2승 4패 33세이브 평균자책점 3.14로 한화의 뒷문을 든든하게 지켰다. 하지만 가을야구가 시작된 후 심하게 흔들렸다. 특히 한국시리즈에선 3경기에 나서 평균자책점 10.13을 기록하며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다. 그러나 구대성은 후배에게 따뜻한 점수를 줬다. 그는 "이제 막 마무리 보직을 맡은 투수다. 내가 처음 마무리를 맡았던 1994년과 비교하면 훨씬 잘했다"며 "한국시리즈에서 흔들리긴 했지만, 끝까지 완주했다는 것에 박수를 쳐줘야 한다"고 격려했다. 이어 "앞으로 '내 볼은 절대 못 친다'는 자신감으로 좀 더 대범하게 타자들을 상대하면 한 뼘 더 성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구대성은 새로운 도전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올해 중국에서 기업들이 참여하는 프로리그가 출범한다"며 "총 5개 팀으로 시작하는데, 나는 그중 상하이 브라더스 감독으로 부임한다"고 밝혔다. 이어 "KBO 퓨처스리그(2군)와 비슷한 수준인데, 상하이 팀은 우승 전력으로 분류된다"며 "한국 선수도 6~7명 정도 데려갈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50대 중반을 넘어선 구대성이지만, 그는 처음 야구공을 잡았을 때처럼 여전히 들뜬 마음으로 또 다른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박주희 기자 jxp938@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