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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서학개미의 ‘오징어 게임’

동아일보 이호 기자,주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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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 “손실 위험 높아도 투자”… 고수익 노리며 진격하는 서학개미들

3배 레버리지 등 고위험 투자 적극, 美 증시서 ‘오징어 게임’ 비판 나와

고환율-포모에 공격적으로 뛰어들어… ‘박스피’ 불안감이 미국주식 투자로

혁신기업 없는 韓시장 매력 못 느껴… 국내 집값 급등이 ‘슬픈 투기’ 불러

인덱스펀드 등 안전 투자처 늘려야… “해외 고위험 투자 규제를” 주장도

“일단 질러보자.”

경기 용인시에 사는 이충재 씨(39)는 올해 6월 미국 주식시장에 투자하는 ‘서학개미’ 대열에 합류했다. 주변에서 지인들이 “미국 주식으로 큰돈을 벌었다”고들 말했기 때문이다. ‘나만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초보 서학개미’인데도 미국 반도체 섹터 지수의 일별 성과를 3배로 추종하는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 ETF는 기초 지수가 1% 상승하면 해당 펀드 수익률이 3% 오르고, 반대로 지수가 1% 하락하면 수익률이 3% 떨어진다. 이 씨는 200만 원을 투자했는데 다행히도 미 증시가 무섭게 오른 덕에 수익이 반년 만에 2배가량으로 올랐다. 이 씨는 화끈한 수익에 짜릿하면서도 동시에 불안하다. 그는 “쉽게 벌어들인 만큼 쉽게 잃을 수도 있으니 매일 주식계좌를 쳐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서학개미들이 더욱 거칠어지고 있다. 미 증시의 고위험 상품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며 고수익을 꾀하고 있다. 외신에선 ‘서학개미들이 미 증시에서 오징어 게임을 벌이고 있다’는 진단까지 나온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처럼 서학개미들이 게임의 규칙을 제대로 모른 채 무모하게 게임에 덤빈다는 얘기다. 대부분 비극적인 종말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도 섞여 있다. 공격적인 서학개미들이 늘자 해외 고위험 투자에도 국내 상품과 비슷한 규제를 적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 “서학개미, 미 증시 변동성 높여”


서학개미들의 해외주식 투자 규모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서학개미의 해외주식 순매수는 10월 68억1300만 달러(약 9조9800억 원)로, 월별 기준 역대 최대치였다. 11월에도 55억2448만 달러(약 8조950억 원)를 사들였다. 미 증시가 인공지능(AI) 관련 기술주를 중심으로 올해 수차례 최고치를 경신하며 질주하자 서학개미들이 늘고 개인들의 투자도 늘었다.

미 증시에 올라타는 한국 개인투자자들이 늘며 거칠게 투자하는 양상도 나타났다. 실제로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이들은 고위험 파생상품에 대한 투자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고위험 투자상품은 국내에서 허용되지 않는 레버리지 및 가상자산 관련 상품이 대표적이다. 2024년 6월 말 기준 서학개미의 해외 보유 상위 50위 종목의 보관 잔액 중 고위험 투자상품의 비중은 12%였다. 해당 비중이 1% 수준이었던 2020년과 비교하면 약 4년 만에 11%포인트가 불어난 것이다.

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레버리지 상품은 ‘디렉시온 데일리 TSLA 불 2X 셰어즈 ETF’다. 테슬라를 2배 추종하는 상품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입소문을 탄 종목을 뜻하는 ‘밈 주식’도 이러한 고위험 상품에 포함된다. 밈 주식은 기업의 실적이나 가치와는 관계없이 주가가 급등락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재테크 카페에서 한 투자자는 “미국 밈 주식에 투자했다가 투자금의 절반을 손절하고 나왔다”며 “밈 주식 투자는 사실상 ‘도박’이라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토로했다.



비욘드 미트가 대표적이다. 서학개미들은 비욘드 미트 주식을 올해 초부터 11월까지 1억7512만6584달러(약 2566억 원) 순매수했다. SNS 등에서 비욘드 미트가 밈 주식으로 지목받은 영향이다. 하지만 매수세가 집중된 이후 비욘드 미트 주가는 급격히 하락했다. 올해 10월 22일(현지 시간) 주당 7.69달러까지 올랐던 주가가 최근 1달러대까지 떨어졌다.

가상자산 관련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비트코인 채굴기 제조 기업인 ‘비트마인’과 스테이블코인인 ‘USDC’ 발행 기업 ‘서클’ 순매수가 많다. 가상자산 관련주들은 최근 일본의 기준금리 인상 전망에 따라 ‘엔 캐리 트레이드’(엔화를 저리로 빌려 고수익 자산에 투자) 청산 우려가 커지고 중국의 가상자산 단속 소식이 나오며 급락하기도 했다. 이달 1일(현지 시간) 비트마인의 주가는 약 한 달 전에 비해 32.5%, 서클은 35.6% 추락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달 12일(현지 시간) ‘오징어 게임 시장: 아시아 개인투자자들이 미국 밈 주식을 선도하다’라는 기사를 통해 서학개미들의 위험한 투자 성향을 소개했다. FT는 “한국 투자자의 공격적인 투자와 고위험 감수 성향이 미국 주식시장의 변동성을 높이고 있다”고 해석했다. 앞서 올해 3월 미국 자산운용사 아카디안의 오언 러몬트 수석 부사장도 ‘오징어 게임 주식시장’이라는 보고서에서 “게임 참가자들이 규칙을 잘 모른 채 위험한 게임에 뛰어들듯 한국 투자자도 빠르게 부자가 되기 위해 과도한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 “원화 녹을까 봐 공격적으로 미 증시 투자”


한국 투자자들이 미 증시를 무대로 오징어 게임까지 벌이게 된 이유로는 원-달러 환율 급등(원화 가치는 하락)이 꼽힌다. 원화 가치가 더 떨어질 수 있으니 달러화로 수익을 불리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간 한 번도 미 증시 투자 경험이 없었던 변호사 이모 씨(34)도 고환율을 걱정해 500만 원을 환전해 지난달 중순부터 미 증시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엔비디아와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상장지수펀드(ETF)에 꾸준히 넣으니 든든하다. 이 씨는 “1400원대 환율이 ‘뉴노멀’이라는 기사를 보고 애써 번 돈이 녹는다는 생각에 투자를 결심했다”며 “은퇴 준비를 위해 가입했던 연금저축펀드와 개인형퇴직연금(IRP)은 입금을 중단하고 원화를 환전해 달러화로 미 증시에 넣는다”고 했다.

이런 투자자들은 고환율 때문에 미 증시에 투자하면서도 향후 환율이 떨어질까 봐 불안하다. 서울 광진구 거주하는 김진우 씨(38) 씨는 원-달러 환율이 1350원대일 때부터 1470원대일 때까지 미국 주식에 수년간 꾸준히 적립식으로 투자했다. 막상 투자금을 불리고 보니 원-달러 환율이 떨어질 때 미 주식 계좌의 달러화를 원화로 환전하면 환차손 때문에 수익이 떨어질 수 있어 걱정이다. 김 씨는 “환율이 최근 급격하게 오른 것도 문제였지만, 앞으로 급격하게 내려가는 것도 걱정이다”라고 털어놨다.


● 지지부진한 ‘박스피’에 미국으로 진격

서학개미의 태동은 지지부진한 코스피 탓이었다. 코스피에서 수익을 내기 힘드니 미 증시로 건너간 이들이 생겨났다. 2017년부터 서학개미들이 부각되기 시작하더니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전 세계 자금이 미국으로 몰리자 미 증시 투자 열기가 고조됐다. ‘포모(FOMO·소외 공포)’ 현상으로 서학개미도 이러한 기류에 본격적으로 탑승했다.

코스피가 소위 ‘박스피’라는 오명을 갖게 된 배경으로 국내 기업의 혁신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미국의 경제 시스템은 혁신기업이 나오면 기존 대기업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선순환 구조다. 반면 한국은 1970, 80년대 대기업이 여전히 시가총액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에서 삼성전자보다 더 큰 대기업을 만들고 싶어 하는 기업가가 몇이나 되겠는가”라며 “한국 기업들의 주식은 미국의 혁신기업들에 비해 매력적이지 않다”고 강조했다.

최근 투자 광풍은 부동산 시장 과열 탓이라는 분석도 있다. 수도권 집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가운데 정부의 대출 규제로 내 집 마련의 꿈이 더욱 멀어졌기 때문이다. 집을 살 기회를 잃은 젊은층은 증시에서만은 이탈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셈이다. 안 교수는 “서학개미를 욕하기보다 부동산 가격을 올려놓은 정부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한다”며 “현재 젊은 서학개미의 투자 행태는 ‘슬픈 투기’다”라고 꼬집었다.

● “해외 투자 시 국내 투자와 같은 규제 적용해야”

서학개미들의 공격적인 투자 성향이 큰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안전한 투자처에 비중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러몬트 부사장은 “지루하더라도 인덱스펀드(개별 주식이 아닌 지수에 투자하는 펀드)를 매수하는 것이 최선”이라며 “오징어 게임에서 최선의 선택은 게임에 참가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규제를 통해 서학개미의 공격적인 투자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에서는 2020년 7월부터 국내 레버리지 파생상품에 투자할 때는 예탁금을 걸고, 사전교육을 이수해야 하는 규제가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해외 고위험 투자에는 이러한 규제가 없다. 김한수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금융소비자 보호의 측면에서 국내와 해외 상품에 대한 동등한 규제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호 기자 number2@donga.com
주현우 기자 wooj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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