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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잔에 담긴 ‘그리스도의 피’

조선일보 명욱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앤소믈리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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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명욱의 酒키피디아] (4)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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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Christmas)는 ‘Christ(그리스도)’와 ‘Mass(미사)’의 결합어다. ‘그리스도를 위한 미사(예배)’, 즉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미사를 뜻한다. 흔히 쓰는 약칭 ‘Xmas’의 ‘X’ 역시 그리스도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의 첫 글자 ‘키(Χ)’에서 유래했다.

이 성스러운 미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술이 ‘예수의 피’라 불리는 와인이다. 왜 하필 와인이었을까? 예수는 자신을 포도나무에 자주 비유했다. 포도나무는 척박한 땅일수록 뿌리를 깊게 내리고 좋은 열매를 맺는다. 땅이 비옥하고 물이 풍부하면, 포도나무는 미래를 위한 열매보다는 당장의 잎사귀와 가지만 무성하게 키운다.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열매는 맛이 없고, 결과적으로 좋은 와인이 될 수 없다. 이는 우리 삶이 고난 없이 평탄하기만 하면, 내면의 성숙 없이 겉치레만 화려해질 수 있음을 경계하게 만든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접붙이기에 있다. 포도는 씨앗이 아닌 접붙이기를 통해 확장된다. 튼실한 뿌리(대목)에 가지를 접붙이면, 아무리 볼품없는 가지라도 뿌리의 생명력을 이어받아 튼튼하게 자라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성경 구절은 이 원리를 말한다. 부족한 인간(가지)이라도 예수(나무)에게 접붙여져 그 말씀의 수액을 공급받으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와인은 제조 과정 자체가 부활을 상징한다. 독일 신학자이자 와인 전문가 지젤라 크레글링거는 ‘포도주와 영성’에서 “발효는 단순한 화학 작용이 아니라 창조의 신비가 극대화되는 부활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포도가 으깨지고 터지는 압착 과정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이후 맑고 영롱한 술로 변하는 과정은 부활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미국 성공회 신부 로버트 파라 카폰 역시 “포도는 으깨져서 형체를 잃는 ‘죽음’을 통해서만 와인이라는 ‘영광스러운 육체’를 입을 수 있다”며 이를 “부활(Resurrection)”이라고 했다. 금방 썩어버릴 생과일(유한한 생명)이 수십 년을 견디는 와인(영원한 생명)으로 변모하는 것, 이것이 와인의 가장 강력한 상징이다.

중세까지만 해도 와인은 성직자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거룩한 성혈(聖血)을 아무나 만들 수 없다”는 이유로 수도원의 ‘기도하는 손’이 양조를 독점한 경우가 많았다. 당시 서민들은 포도 찌꺼기에 물을 타 끓인 ‘피케트’라고 불리는 밍밍한 술로 만족해야 했다.

와인이 모두의 식탁에 오르게 된 것은 프랑스 대혁명과 산업혁명 덕분이다. 시민혁명으로 귀족과 교회의 포도밭이 해방돼 누구나 와인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뒤이어 등장한 철도는 프랑스 남부의 저렴하고 맛있는 와인을 파리와 같은 대도시로 빠르게 실어 날랐다.


크리스마스 풍경도 시대와 함께 변해왔다. 중세의 크리스마스는 가족끼리 오붓하게 보내는 날이 아니었다. 영주와 농노, 마을 주민 전체가 어울려 왁자지껄하게 즐기는 공동체의 축제였다. 춥고 긴 겨울을 나기 위해 광장에 모여 따뜻하게 데운 와인인 ‘글뤼바인’을 마시며 월동 준비를 하던 것이 오늘날 ‘크리스마스 마켓’의 기원이다.

우리가 아는 가족 중심의 크리스마스 풍경에는 19세기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1843년)이 큰 영향을 미쳤다. 구두쇠 스크루지가 개과천선해 가난한 직원 밥 크래칫에게 칠면조를 보내고, 조카의 가족 파티에 참석하는 결말은 당시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다. “돈이 많아도 나누지 않으면 불행하고, 가난해도 가족과 함께라면 행복하다”는 메시지가 각인됐다. 소설의 마지막, 회개한 스크루지가 밥 크래칫에게 건네는 “스모킹 비숍(따뜻한 와인 칵테일) 한 사발을 나누자”는 제안은, 와인이 단순한 술을 넘어 화해와 사랑의 매개체임을 보여준다.

미국에서는 클레먼트 무어의 시 ‘성 니콜라스의 방문’이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라는 인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산타클로스가 잠든 아이들을 위해 선물을 두고 가는 모습이 묘사되면서,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술 취한 어른’에서 ‘아이들과 가정’으로 옮겨갔다.


크리스마스에는 비싼 와인을 마셔야 할까?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은 명쾌한 답을 준다. 밥 크래칫 가족은 저렴한 진(Gin)에 레몬과 설탕, 뜨거운 물을 섞은 소박한 칵테일 ‘핫토디’를 마시면서도 진심으로 행복해하며 건배한다. “신이여, 우리 모두를 축복하소서!” 결국 중요한 건 술의 가격이나 종류가 아니다. 잔을 채우고 있는 가족의 사랑과 온기다.

[명욱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앤소믈리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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