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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못했다[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19〉

동아일보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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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끔찍한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졌는데
그날 밤 얼굴 위에 수천 장 분량의 별빛이 쏟아졌는데
눈동자가 오리온좌의 모서리를 스칠 때마다 몹시 시렸는데
크게 운 다음에는 꼭 따뜻한 차를 마셨는데
내가 끝내 돌아갈 곳은……
한사코 확신을 거부했는데
국경보다 공원이
능선보다 강변이 더 좋았는데
걷고 걸었는데
먼 길을 돌고 돌았는데
불안은 영혼 속에서 배회하는 개새끼
새벽마다 울부짖게 내버려뒀는데

―심보선(1970∼ )



어떤 시는 읽으면 시를 쓰고 싶어진다. 무릎 언저리에서부터 무언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느낌이 들고 그것이 목구멍쯤 올라왔을 때 펜을 쥐게 되는 시. 이 시가 그렇다. 시인이 말하는 ‘이 기분’을 알아서 그렇다. “끔찍한 일”이 있었고 “먼 길을 돌고 돌았는데” 쓰지 못한 날들, 그러나 쓰지 못했다는 고백만으로 이미 충분한 시가 되는 일.

“불안은 영혼 속에서 배회하는 개새끼”라니, 누가 내 영혼을 반으로 가르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풍경을 보고 쓴 것 같다. 꼬리를 다리 사이에 숨기고 여기저기를 맴맴 도는 개, 내 영혼의 흙바닥에 코를 대고 어떤 냄새를 추적하려 서성이는 개를 안다. 심보선의 시에는 불순물이 없다. 자극적인 요소 없이 ‘자연스러운 놀라움’을 준다. 나는 법을 잊은 채 나는 새처럼 헤엄치는 법을 잊은 채 멀리 가는 물고기처럼 편안하고 유려하다.

시인이 말하는 “내가 끝내 돌아갈 곳”은 어디일까? 말줄임표 너머를 상상해 보건대 그곳은 종이 위, ‘시’라는 장소가 아닐까? 시인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찾아가 종국에 거처해야 하는 곳. 그곳에서 그는 울부짖는 개를 달래며 쓰지 못했던 것, 겨우 쓸 수 있는 무언가를 더듬더듬 쓰게 될 것이다. 크게 운 다음에는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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