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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희야" 억장 무너지는 시신 가매장 현장··· 45년 만에 찾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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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과 검열] ③ 광주로 간 기자들
임시취재반, 목숨 걸고 취재 전념했지만
시신 가매장·진혼제 현장 기사마저 삭제
사보에 실으려던 열흘간 취재기도 검열
광주 참상 기록한 사진들도 뒤늦게 발견

편집자주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지난해 12월 3일 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 포고령 제3항은 권력이 언론을 암전한 45여 년 전의 악몽을 떠오르게 했다. 역사는 돌고 돌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격언을 상기시킨다. 독재 권력이 등장할 때, 가장 먼저 장악하려는 것이 언론이며 언론인은 독재자의 탄압과 가해를 가장 혹독히 겪는 직업군이다. 한국일보는 12·3 불법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1980년 전후 권력이 지운 352개의 기사를 발굴해 뒤늦게 독자들께 배달하면서, 비록 기사를 신문에 싣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취재하고 처절하게 맞섰던 당시 본보 기자들의 증언을 모으고 기록했다.


1980년 5월 29일 광주 시민들의 장례식에서 유족이 관에 얼굴을 묻고 오열하는 모습. 이하 사진들은 모두 광주 임시취재반에 파견된 사진부 기자들이 촬영한 것으로, 당시 신군부의 검열에 막혀 전부 보도되지 못하다가 약 40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공개됐다. 한국일보 임시취재반

1980년 5월 29일 광주 시민들의 장례식에서 유족이 관에 얼굴을 묻고 오열하는 모습. 이하 사진들은 모두 광주 임시취재반에 파견된 사진부 기자들이 촬영한 것으로, 당시 신군부의 검열에 막혀 전부 보도되지 못하다가 약 40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공개됐다. 한국일보 임시취재반


서울서 광주로 보낸 기자만 6, 7명. 많은 기자가 목숨을 걸고 취재했기에 '검열'은 더욱 아팠다. 1979년 10월~1981년 1월, 계엄사 언론검열단에서 삭제한 한국일보 기사 352개 중에는 5·18민주화운동의 생생한 현장 기사들이 있었다. 시신 가매장 현장에서 찢어지는 유족의 마음과 방철호 목사의 웅변 같은 기도, 주변 논밭에서 일하던 농민들까지 달려와 함께 슬퍼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신문에 취재 내용이 실리지 않자 조성호·채의석 기자는 한국일보 사보(사내 소식지)에 취재기를 실었는데, 그마저도 삭제되었다가 45년 만에 발견됐다. 조 기자는 "소리를 다하지 못하는 한 그 비극적인 대유혈의 악몽은 끝내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고 맺었다. 그는 "이 취재기도 (원본이 아니라) 데스크(상사)가 다듬은 것"이라고 회고했다.

본보가 광주에 파견한 임시취재반은 가장 먼저 광주로 파견된 김해운 사진부 기자에 이어 19일 조성호·유동성 사회부 기자가 파견됐고, 21일 사회부 채의석, 사진부 박태홍·김용일 기자 등이 추가로 현장에 투입돼 꾸려졌다. 광주 주재 이상문 기자를 반장으로 박희서·김향옥 기자 등 호남지역본부 기자들도 취재에 매진했다. 이들의 취재 내용이 담긴 대표적인 두 개의 기사를 게재한다. 명백한 오타는 교정했으나, 약간의 문맥이 맞지 않은 부분은 그대로 담았다. 기사 내용 중 ‘O’으로 표시된 곳은 검열 문서에서 글씨가 식별되지 않은 부분이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시간순 정리. 그래픽=송정근 기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시간순 정리. 그래픽=송정근 기자


<1> "천하보다 중한 생명, 무참히 꺾였다"


제목: 유족 통곡 속 가매장

1980년 5월 29일 광주 시민들의 장례식에서 유족이 관에 얼굴을 묻고 오열하고 있다. 한국일보 임시취재반

1980년 5월 29일 광주 시민들의 장례식에서 유족이 관에 얼굴을 묻고 오열하고 있다. 한국일보 임시취재반


도청 앞 상무관에 안치됐던 희생자 시체 일부가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 시 외곽 망월동 시립공원묘지에 운구돼 간단한 진혼제에 이어 오후 1시 30분경 모두 하관을 마치고 가매장됐다.

이 공원묘지 가매장지는 묘역이 미처 조성되지 않은 정문 서쪽 구릉에 가묘를 60센티 간격 7열로 파놓아 급조됐다. 운구가 끝난 뒤 낮 12시 반경 효죽동 동신고교 앞에서 버스 2대에 나누어 타고 장지에 도착한 유족들은 가묘 앞에 일렬로 놓여진 관을 일련번호만 확인, 땅바닥을 치며 통곡했다. 지난 21일 금남로에서 사망한 전남대 법대 2년 김광석 군(26)의 어머니 신상임 부인(57)은 아들의 관을 맞대고 『농사지어 공부 다 해갖고 어째서 여기 와 있냐』며 통곡, 보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김 군의 관에는 「학생순천김공지관」이라고 붉은 천이 덮여 있었다. 또 춘태여상에 재학 중 숨진 박금희 양의 어머니는 『금희야』 딸의 이름을 쉬임없이 불렀다. 이날 장례식은 낮 12시 35분 합동 진혼제에 이어 오후 1시 20분 가묘에 하관함으로써 간단히 끝났는데 나머지 희생자들의 시체는 오후 2시 묘지로 옮겨져 가매장되는 것을 비롯, 장례절차를 마치는 대로 계속 가매장된다. 이날 진혼제는 곶감·대추·사과·배 등 과일과 돼지머리·떡·나물 등 제수가 간소하게 차려진 제상 아래 유족들과 관계자들이 둘러서 진행됐다.


이날 진혼제에는 대한성결교회 주월동교회·방철호 목사, 관음사 한상인 스님 등의 기도와 독경으로 이어졌다. 방 목사는 웅변과 같은 기도를 통해 『5월이 마지막 다 가는 이날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이 무참히 꺾이어 흙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여 어린 양들을 보살피소서. 이들의 피가 헛되지 않도록 하느님 아버지 이 민족을 보살피소서. 이 땅의 모든 민중의 희망찬 내일을 위한 한 알의 썩은 밀이 되도록 굽어살피소서』라고 기도했다. 이날 장례식은 구용상 광주시장이 낮 12시 20분경 도착, 지켜보았으며 분향제상앞에는 김종호 신임 전남도지사, 이대순 전남도교육감, 민준식 전남대총장, 박철웅 조선대총장, 구용상 광주시장 등이 보낸 조화 화환이 나란히 놓여져 있었다. 한편 유족들은 『이렇게 가묘에만 묻어 놓으면 끝나는 거냐』며 『사후 대책을 하나도 연락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편 인근 담양군 석곡면 주민들과 광주시 태평동 주민 50여 명이 논밭에서 달려나와 함께 울먹이며 유족들을 위로하는 모습도 보였다.

【광주=임시취재반】


※계엄사 언론검열단의 문건에 따르면 당시 광주 망월동 가매장 현장 취재는 한국일보와 동아일보가 했으며 위 기사도 두 언론사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 5월 29일 광주 시민들의 장례식에서 유족이 관을 끌어안고 오열하고 있다. 한국일보 임시취재반

1980년 5월 29일 광주 시민들의 장례식에서 유족이 관을 끌어안고 오열하고 있다. 한국일보 임시취재반


<2> 고립된 광주, '총성·곡성' 대유혈 비극


제목: 5·18 광주 취재기 (가제)

신군부검열기획. 그래픽=송정근 기자

신군부검열기획. 그래픽=송정근 기자


○···37기 유동성 기자와 함께 광주에 도착한 것이 지난달 19일 하오 8시 35분께. 고속버스가 시내에 들어가지 않고 외곽 지대에서 승객을 내리게 해 시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비가 퍼붓는 밤길을 따라 광주역 쪽으로 무작정 뛰었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은 모두 차단 상태였고 멀리 유동 쪽에서 대형트럭 1대가 불타면서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시내로 접근하는 길목을 찾다가 통금시간인 밤 9시가 됐다. 하는 수 없이 광주역 앞에 있는 강성여관이라는 델 들어갔더니 3층에 마지막 방 1개가 남아있었다. 저녁 대신 물을 마시면서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서 유리창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쫓아나가 보니 길 건너 KBS 건물 유리창을 몽둥이를 든 군중 1백여 명이 때려부수고 있었다. 밤 9시 50분께였다. 곧이어 경찰 기동대가 3백 명가량 나타나더니 이들을 추적, 역과 인근 길목을 뒤지느라 아우성이었다. 밤 10시 15분쯤인가 기동대가 우리가 투숙한 여관 건물을 뒤졌다. 험악한 표정으로 방문을 열어보기를 3번 하더니 대학생 차림으로 보이는 유 기자를 노려보며 신분증을 요구했다. 신분증을 보여주니 『미안하다』면서 물러갔다. 2층 다방에서는 종업원과 같이 있던 청년 1명이 얻어맞고 연행됐다. 오자마자 시작이었다.

1980년 5월 20일 광주 시내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 200여 명이 금남로로 몰려와 계엄군에 맞서 차량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국일보 임시취재반

1980년 5월 20일 광주 시내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 200여 명이 금남로로 몰려와 계엄군에 맞서 차량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국일보 임시취재반


○···20일 아침 광주의 이상문 반장과 함께 시내를 돌았다. 시가엔 계엄군의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 있다. 18, 19일에 있었던 시위와 계엄군의 진압 유혈사태를 둘러싼 갖가지 소문이 시가에 만발해 있었다. 상오 9시께 지나가는 장의차를 세워 「가두문상」을 했더니 광주공원 뒤 양조장 공터에서 시체로 발견된 김모씨(35·월산2동)의 유족이었다. 이날의 시위는 하오 3시 넘어 시작돼 하오 5시께부터 두 갈래로 본격화됐다. 밤늦게부터 중요시설이 불타기도 했다. 작게는 5백 명에서 많게는 2만여 명에 이르는 군중들 틈새에서 최루탄을 마시며 뛰기를 6~7시간 하다 보니 기진맥진해버렸다. 밤 10시 30분께 금남로통의 군중은 모두 사라졌으나 제봉로에선 MBC 건물이 전소된 데 이어 시위군중의 함성이 요란하게 밤새 울렸다.

○···21일 새벽 1시 20분~30분 사이 세무서와 삼성차고 쪽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본사에 급히 전화를 한 뒤 새벽 1시 30분께 광주의 김향옥 기자와 유 기자 셋이서 그쪽 취재를 하러 사람 하나 없는 금남로3가길을 건넜을까 우리 옆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기겁을 해 유 기자 보고 엎드리라 소리치고 오던 길로 후퇴했다. 김 기자가 안 보였다. 30분쯤 뒤에 알고 보니 김 기자는 길 건너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시위 군중으로 오인돼 계엄군에게 붙들려 몇 대 두들겨 맞았다. 다행히 안면 있는 대위를 만나 기자임을 확인받고 도청으로 인계됐다는 것.

20일 밤, 21일 새벽이 대수난을 당한 밤이기도 했다. MBC 5층 건물이 전소했는가 하면 자정께 KBS 건물이 불타고 광주의 중앙일보-TBC 건물 유리창이 박살 났다. K지의 수송차가 시위대에게 빼앗겼는가 하면 한국일보지사 수송차도 빼앗겼다 되찾았다. 언론에 대한 반감이 절정에 이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앞서 20일 밤 10시 ○는 청년 15명가량이 지사 안으로 몰려오더니 『신문·방송을 그냥 둘 수 없다』면서 길가에 있는 지사 수송 트럭을 부수자고 했다. 일났다 싶어 그 속에 끼어들어 『개인 재산은 그냥 두지』 했더니 『그 말이 맞다』면서 물러났다.

'피의 초파일'이라 불리는 1980년 5월 21일, 광주 금남로 주변 골목에서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의 시가전이 벌어진 가운데 시민들이 벽에 붙어 선 채 피신해 있다. 한국일보 임시취재반

'피의 초파일'이라 불리는 1980년 5월 21일, 광주 금남로 주변 골목에서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의 시가전이 벌어진 가운데 시민들이 벽에 붙어 선 채 피신해 있다. 한국일보 임시취재반


○···21일은 초파일. 광주시가 완전 고립되면서 대유혈극을 빚은 날이었다. 아침부터 수십만 군중이 시가로 몰려나오더니 금남로에서 도청을 바라보고 거센 시위를 했다. 고전적인 시위의 한계는 이미 벗어나 무장대원들이 눈에 띄면서 공포의 그림자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오 1시께 장갑차 1대가 군저지선 쪽으로 돌진한 뒤 발포가 시작되고 전열 쪽에 있던 사람들이 쓰러졌다. 그때 송정리에 와있던 목포의 김수영 기자에게 릴레이 송고를 한 뒤 다시 뛰쳐나갔다.

하오 2시 10분께 금남로2가 쪽인 관광호텔 쪽으로 가고 있는데 총성 1발이 울리더니 4~5m가량 길 쪽에 있던 사람이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산수2동에 사는 김모씨(39)였다. 위험권을 벗어나자 싶어 금남로3가 4거리로 물러섰다. 어디선가 소총을 계속 싣고 와 나누어 주었으며 무장 청년들이 세 종장들 건물에 잠입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후 총성이 남발되면서 사태는 완전히 전쟁으로 변했다.

이날 하오 5시 지나 계엄군이 외곽으로 물러나고 도청을 비롯한 시가는 시위대에게 점령됐다. 각 병원에는 사상자가 줄을 이었다. 【광주=조성호 기자】

1980년 5월 21일 광주 후발대로 파견된 채의석(왼쪽 두 번째) 당시 한국일보 사회부 사건팀장, 박태홍(왼쪽 다섯 번째)·김용일(왼쪽 여섯 번째) 당시 사진부 기자의 모습. 오토바이를 타고 광주 시내로 본격 진입하기 전 촬영한 것으로, 나머지 인원은 신원이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박태홍 전 한국일보 기자 제공

1980년 5월 21일 광주 후발대로 파견된 채의석(왼쪽 두 번째) 당시 한국일보 사회부 사건팀장, 박태홍(왼쪽 다섯 번째)·김용일(왼쪽 여섯 번째) 당시 사진부 기자의 모습. 오토바이를 타고 광주 시내로 본격 진입하기 전 촬영한 것으로, 나머지 인원은 신원이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박태홍 전 한국일보 기자 제공


○···22일 거리는 온통 무장청년, 무장차량이 진을 치고 시위를 했다. 이날 상오 11~12시 무렵 ○의○, 홍융기, 박태홍, 김용일 기자 등 사회부, 사진부 4명이 위기를 겪은 뒤 외곽에서 뿔뿔이 흩어져 시내로 들어왔다. 이들은 21일 밤을 송정리에서 1박하고 22일 상오 우연히 열혈청년 3명을 만나 광주 시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 송정리의 청년들은 오토바이 3대를 몰고 나와 우리 일행 광주~송정 간 고속도로를 차단한 상무대 앞 계엄군직 전방에서 우회 ○길을 타고 광주에 잠입할 계획이었다. 오토바이 3대가 요란한 소리를 지르며 송정리역을 출발 텅 빈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을 때는 불안한 표정으로 골목골목에 모여있던 시민들은 뜨거운 갈채를 보내주었다. 우리를 시위대의 돌격조쯤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채 1km도 전진하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계엄군은 이미 송정리 외곽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후퇴한 취재팀은 ○○ 가는 구 도로를 택했다. 논길 철길 강뚝을 거쳐 광주 외곽 동○동에 도착한 것이 낮 12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송정리 안내자들의 도움으로 무장시위대의 군트럭에 승차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시위대는 뒤로 5백여m를 후진, 이 마을 ○터에 집결하는 것이었다. 트럭이 멎은 잠시 뒤 인원 점검을 하던 시위대 지휘자는 낯선 일행의 신분을 물었고 기자라는 신분이 밝혀지자 홍 박 김 세 기자에게 개머리판을 들어치는 등 무조건 폭력을 행사했다. 자동차가 멎은 직후 예감이 이상해 차를 내렸던 ○ 기자만은 화를 면했다는 것이다.

○···이때 폭탄을 피하러 그 차를 뛰어내린 김 기자는 결국 10여 개의 총구 앞에 포위돼 사살되는 듯 ○○○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일행은 마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민가에 인도 뒤 언 냉수로 공포를 씻었다. 이 와중에서 박 기자는 차에서 내리지 못한 채 시내로 들어가 ○○을 피할 수 없었다.

다시 주민들의 설득으로 다른 무장시위대의 트럭을 타고 도청 앞 금남로에 들어섰다. 중심가는 아비규환이었다.

하오에 지사를 찾아 미리 와있던 박 기자를 만났다. 박 기자는 카메라와 신분증을 뺏긴 것을 알았다. 홍 박 김 3기자는 광주에 첫발을 디디면서 겪은 때때의 공포를 광주를 떠나올 때까지 벗어날 수 없었다. 박 기자의 카메라는 렌즈만 없어진 채 신분증과 함께 시위대 본부에 수일 후 돌아와 있었다.

기자에 대한 적의는 사실 보도를 추구하는 격한 경고였음을 우리는 유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 5월 27일 광주 시내에서 계엄군의 탱크가 지나가는 모습. 앞서 이날 새벽 공수부대에 의한 시민 무력 진압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이 개시됐다. 한국일보 임시취재반

1980년 5월 27일 광주 시내에서 계엄군의 탱크가 지나가는 모습. 앞서 이날 새벽 공수부대에 의한 시민 무력 진압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이 개시됐다. 한국일보 임시취재반


○···취재팀은 또 하나 잊지 못할 추억을 간직하게 됐다. 광주시 전 시가가 ○시 일부는 피란을 떠날 만큼 시민들이 불안해한 상황에서도 우리들에 정성껏 식사를 제공해준 황금식당의 김○○ 김○○○ 부부의 희생적 봉사는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는 값진 것이었다. 부연하자면 여관과 식당이 거의 영업을 중지한 속에서 김씨 부부는 취재팀이 피란을 권유했으나 이를 마다하고 우리의 식사를 도왔고 틈이 나지 않아 식당을 찾지 못하면 어김없이 전화로 식사할 것을 채근했다.

황금식당은 무장시위대의 본부였던 전남도청에서 지근거리에 위치, 곳곳에서 때를 안 가리고 터지는 총탄 그리고 이웃 병원과 식료품점이 정체불명의 무장괴한에게 금품을 털려 불안이 한층 가중된 상태였다. 식당의 마담 김 부인은 채의석 기자의 죽마지우의 여동생으로 본사 취재팀이 늘 신세를 져 왔다. 본사는 황금식당에 감사패를 전달, 인사의 일단을 전하기로 했다. 【광주=채의석 기자】

취재팀 증원을 받은 후부터 본격적인 분담 취재에 들어갔다. 이날 하오 4시께 전남대병원 영안실에 들렀다. 곳곳에 놓인 28구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영안실 일대는 곡성과 관에 못 박는 소리가 뒤섞여 요란했다. 눈뜨고는 못 볼 처참한 광경이었다. 하오 ○시 30분께 트럭을 타고 온 무장청년이 포장 밑에 놓인 시체를 확인한 순간 총을 휘두르며 『나 혼자는 못 살아. 시민 여러분 같이 갑시다』라고 외쳤다. 총구가 서너 번 돌았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기겁을 했다. 나도 가시철망을 붙들고 몸을 사렸다.

22일 밤 계엄군이 시가 진입을 한다는 소문이 퍼져 긴장이 감돌았다. 밤 8시 40분께 채의석 선배, 광주의 박희서 기자와 3명이 송고할 길을 찾느라고 가장 험한 대치지역이었던 ○○가엘 들어섰다. 바리케이드를 벗어나 DMZ 지역이라고 할 ○○가 주택가 길을 3구비쯤 돌았을 때 4~5m 앞에서 ○건 불빛 2개가 휙 지나갔다. ○보만 빨리 갔더라도 누가 맞아도 맞았을 판이었다.

1980년 5월 27일 광주 전남도청 내에 계엄군에 의해 희생된 광주 시민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모습. 군부는 27일 새벽 광주 시내로 공수부대를 투입, 시민들을 무력 진압하는 상무충정작전을 개시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한국일보 임시취재반

1980년 5월 27일 광주 전남도청 내에 계엄군에 의해 희생된 광주 시민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모습. 군부는 27일 새벽 광주 시내로 공수부대를 투입, 시민들을 무력 진압하는 상무충정작전을 개시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한국일보 임시취재반


○···그 뒤 5일을 지나 27일 새벽 계엄군이 진주, 시가를 장악했다. 28일 낮 계엄군이 장악한 시가를 벗어나 험로를 따라 철수했다. 10일간 지켜본 갖가지 상황이 지금도 머리를 때리고 괴롭힌다. 소리를 다하지 못하는 한 그 비극적인 대유혈의 악몽은 끝내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광주=조성호 기자】

목차별로 읽어보세요

  1. ① 46년 만의 보도
    1. • 46년 전 겨울 내란의 밤, 이제야 그 기사를 배달합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314400001938)
    2. • 46년 전 계엄 때 삭제된 기사 352개, 어떻게 입수했나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916320001408)
    3. • "탕탕탕···" 밤새 취재한 '쿠데타의 밤' 기사 지워지고, 검열 지옥이 열렸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1914530005155)
    4. • "박정희, 서울에 발포 명령 계획" 김재규 최후진술 보도, 전두환의 가위질로 삭제됐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720520001460)
  2. ② 해고, 농성, 고문
    1. • "고문 기술자가 미안해 할 정도로 모진 고문" 전두환 '왕' 만들기에 1000명 넘게 스러졌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1909450005795)
    2. • 간첩 잡던 군인이 언론인 때려 잡았다…감금한 채 "각서에 지장 찍어라"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422270000884)
    3. • "눈물 젖은 신문" "계엄해제 만세!" 꼿꼿했던 만평··· 삭제 45년 만에 전합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3015350001829)
    4. • "공산주의 국가나 언론통폐합" 부인하던 신군부, 두 달 뒤 현실됐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514510000555)
    5. • 5·18 삭제 기사로 되살려낸, 가상의 '한국일보 1980년 5월 신문'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20216210004715)
  3. ③ 광주로 간 기자들
    1. • "계엄군 오니 뜨자" 공포에도…"우리는 식구, 여기서 같이 죽자"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015050001117)
    2. • "금희야" 억장 무너지는 시신 가매장 현장··· 45년 만에 찾은 5·18 삭제 기사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416220004714)


최은서 기자 silver@hankookilbo.com
유대근 기자 dynamic@hankookilbo.com
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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