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협상’이라 하면 국제 회담이나 노사 분쟁, 기업 간 거래를 떠올리기 쉽지만, 협상은 그처럼 멀리 있는 개념이 아니다. 직장에서 상사가 마감일을 앞당기려 하고 직원이 현실적인 일정을 제안하는 순간에도 협상은 작동한다. 친구와 여행지를 고르거나 부부가 휴가 계획을 세우며 서로의 취향과 일정을 조율하는 과정에서도 협상은 필요하다. 결국 협상은 특정한 무대에서만 이루어지는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작동하는 필수적 소통 방식이다.
협상은 단순한 거래 기술이 아니다. 인간이 갈등을 해결하고 관계를 유지하며 공동의 번영을 추구하기 위해 축적해 온 문명적 지혜다. 사회의 작동 방식은 결국 수많은 협상의 집합이며, 정치도 경제도 공동체도 가정도 협상 없이 원활히 유지될 수 없다. 협상은 사회적 신뢰를 쌓고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가장 핵심적인 장치다.
그럼에도 우리는 협상을 종종 ‘거래의 기술’로만 축소해 이해한다. 하지만 협상은 상대를 꺾기 위한 술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율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생활의 산물이다. 협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할 때 사회는 건강해지고 공동체는 단단해진다. 협상은 파이를 나누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전체 파이를 함께 키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은 양보가 큰 신뢰를 만들고, 신뢰는 더 크고 풍요로운 사회를 만든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 협상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다. 정치는 곧 타협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타협을 패배로 규정하며 극단적 대치를 반복한다. 노동시장에서는 신뢰가 무너지고, 시민사회에서는 의견 차이가 곧 적대감으로 번진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갈등이 일상처럼 소비되고, 협상이 사라진 자리는 불신과 분열로 채워진다.
협상과 타협이 없는 사회는 결국 모두가 손해를 본다.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이면 문제없다는 문제의 인식처럼 제로섬 경쟁 속에서는 잠시의 우위만 가능할 뿐, 지속적인 번영은 불가능하다. 사회적 에너지는 생산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소모전 속에서 미래를 잃는다. 겉으로는 강해 보일 수 있어도 내부는 불안정하다. 갈등의 발생 자체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지만, 갈등을 다루는 방식은 선택할 수 있다. 협상은 상대를 적이 아닌 원하는 것을 나누어야 할 이웃으로 보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신뢰가 없으면 대화가 없고, 대화가 없으면 갈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정치에서 협상과 타협의 부재는 국정 교착을 낳는다. 합의 없는 정치는 국민을 방치하고 개혁 과제를 표류시킨다. 사회적 신뢰는 무너지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커진다. 대립과 투쟁만을 반복하는 정치에서는 국가 경쟁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타협이 사라진 정치는 국민을 인질로 삼는 정치일 뿐이다.
경제에서도 협상의 부재는 위기를 초래한다. 노사 간 불신이 극단으로 흐르면 파업과 폐쇄가 반복되며 생산성과 투자 의지가 떨어진다. 협상을 거부하는 태도는 단기적 만족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 성장은 가로막는다. 모두가 손해 보는 결과를 외면하고 한 쪽의 이익만을 주장하는 그것은 사회 전체의 지속성을 스스로 해치는 행위다. 반대로 잘된 협상(good deal)은 공동의 미래를 연다. 서로의 우선순위를 파악하고 숨은 이해관계를 찾아내면 더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기업은 유연성을 얻고 노동자는 안정성을 확보하는 상호 이익적 합의가 가능하다. 협상이 성립하는 순간 갈등은 기회로 바뀌고, 성장과 번영의 기반이 된다.
국제사회도 마찬가지다. 외교적 합의, 무역 확대, 기후 위기 대응 모두 협상의 산물이다. 협상 없는 국제사회는 상상하기 어렵다. 국내 공동체 역시 협상 없이는 지속할 수 없다. 협상은 사회 전체가 협력하고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핵심 자산이며, 이를 수행하는 능력은 사회 성숙도의 지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파이를 독점하는 기술이 아니라 함께 나누며 공존하는 기술이다. 정치권부터 시민사회까지 협상의 문화를 회복해야 한다. 내가 이겨야 끝나는 게임이 아니라 서로가 ‘Win-Win’하는 게임이 되어야 한다. 작은 양보가 큰 신뢰를 만들고, 신뢰는 더 크고 풍요로운 미래를 연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경청이 어우러질 때 협상은 작동하고, 협상이 작동할 때 공동체는 안정되고 번영한다.
우리 사회는 이미 충분한 갈등을 겪었다. 이제는 그 갈등을 성장의 동력으로 바꾸기 위해 협상의 테이블로 돌아가야 한다. 협상을 통해 모두가 더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협상 없는 사회는 미래가 없고, 협상을 존중하는 사회만이 미래를 가진다. 협상과 타협은 정치에서부터 가정에 이르기까지 안정과 화합을 가져다준다. 지금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바로 협상 테이블이며 협상의 정신이다.
생애설계 관점에서 본 ‘협상’은 생애경력·커리어·관계설계에서 필요한 역량이다. 100세 시대의 생애설계는 단순한 직업 선택이나 노후 준비가 아니라 생애 전 주기에서의 전략적 조합과 조율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협상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협상 능력은 국가·조직·사회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을 설계하는 핵심 역량이 된다.
첫째, 생애경력설계 차원에서 보면, 경력은 일방적 선택이 아니라 변화하는 경제·기술 환경, 조직구조, 자신의 가치·역량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적 ‘경력 협상’이다. 직무 재설계, 재교육, 커리어 전환의 시기와 방향은 협상의 관점을 적용할 때 더욱 현실적으로 정립된다. 상대의 요구와 나의 목표를 조율하는 능력은 결국 안정된 경력을 만들어내는 기반이 된다.
둘째, 커리어설계 차원에서 보면, 커리어는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상사·동료·고객과의 역할 협상, 프로젝트 우선순위 조정, 조직 내 이해관계 관리 등은 커리어를 성장시키는 핵심 전략이다. 협상을 잘하는 사람은 갈등을 기회로 전환하며, 자신의 가치를 장기적으로 극대화한다.
셋째, 가족·사회적 관계 설계 차원에서 보면, 가정에서는 역할 분담, 양육, 재정관리에서 끊임없는 협상이 이루어진다. 노년기에 가까워질수록 사회적 관계망은 삶의 질을 좌우하는 자산이 되며, 관계 유지의 핵심은 결국 ‘협상의 기술’, 즉 경청·배려·상호 존중이다. 공동체적 삶의 질 역시 타협과 합의를 기반으로 안정된다.
협상의 정신을 회복하는 사회는 반드시 건강해지고, 협상을 삶의 전략으로 활용하는 개인은 더 안정되고 풍요로운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김주한 칼럼니스트, 한국생애설계사(CLP), 행정학 박사, 전) 숭실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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