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환의 ‘점으로부터’(1973). 점과 점에 운율을 붙여 반복하는 연작 ‘점으로부터’를 시작한 첫 해의 작품이다. 회화의 가장 기본 요소인 점을 생명력의 출발점으로 보고, 처음에는 짙게 찍힌 점이 일정한 리듬에 따라 차츰 희미해지다가 끝내 사라지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작품 속 붓의 움직임을 두고 ‘시간의 리듬’이라고도 할 만큼 정연한 지속성과 흐름을 보여준다. 이 시기 함께 시작한 연작 ‘선으로부터’까지 작가에게 점과 선은 모든 회화 성립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의 근원이다. 점을 찍고 선을 긋는 일회성의 되풀이로 작가는 ‘그린다’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성을 드러내려 했다. 지난 6월 26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Ⅱ’에 걸렸다. 캔버스에 석채, 194×259㎝.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정하윤 미술평론가] 낙찰가 31억원. 한국 미술품 경매에서 국내 생존작가 최초로 30억원을 넘긴 작품은 이우환(89)의 ‘동풍’(1984)이다. 2021년 서울옥션에서 세운 이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미술계에서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숫자이겠지만 사실 일반인들에게는 범접하기 어려운 가격이다. 가격이 가치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그가 이미 현재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이름이 됐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의아하기도 하다. ‘점 몇 개, 선 몇 줄로 보이는 그림이 왜 이렇게 비싼가.’ ‘이우환이 대체 왜 그토록 중요한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사실 그림만 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우환의 생애와 철학, 미술계에 끼친 영향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
이우환은 1936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다. 1956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으나 곧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그러니 처음부터 그는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라기보다는 ‘사유하는 예술가’에 가까웠다. 동양철학과 서구 현상학을 두루 공부하며 예술의 본질을 깊이 고민했고 이 철학적 기반은 이우환 작업의 뿌리가 됐다.
‘물질로 작업’ 日 전위미술그룹 모노하 핵심 인물
일본에서는 비평가와 작가로 동시에 활동하면서 전위미술그룹 ‘모노하’의 핵심 인물이 됐다. 단순히 참여한 정도가 아니라 그룹의 사상적 방향을 제시한 이론적 리더였다. ‘모노하’를 해석하면 ‘물파’(物派)라는 뜻이다. 물질로 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름대로 그들은 가공되지 않은 돌, 철판, 유리, 나무 같은 소재를 이리저리 늘어놓는 작업을 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우환의 대표연작 중 하나인 ‘관계항’(1988)을 보자. 돌 하나, 철판 하나로 만든 설치미술이다. 모노하 출신 작가답게 여기에는 작가의 과도한 개입이나 기술이 없다. 그저 각기 다른 자연물과 인공물이 놓여 있을 뿐이다.
이게 뭘까. 대체 돌, 철판이 뭘 어쨌다는 건가. 여기서부터 이우환, 그리고 모노하의 철학이 시작된다. 겉으로는 물질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진짜 관심은 ‘물질’에 있지 않다. 다양한 물질 사이에 생기는 ‘관계’. 그것이 관심사다. 서로 다른 물질이 어떤 거리를 두고 놓이느냐에 따라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인간과 물질이 맺는 관계는 어떤지를 탐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연물인 돌과 인공물인 철을 함께 사용한 것도 자연과 인공의 관계를 연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작품명이 ‘관계항’인 거다. 무심하게 놓인 것 같은 관계가 사실은 고도의 사고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이것이 이우환의 작품을 흥미롭게도, 또 어렵게도 만든다.
이우환의 ‘관계항’(1988). 사물과 사물, 구체적으로 성격이 다른 자연물과 인공물을 공간에 그대로 놓아두는 방법으로 존재의 의미와 관계에 주목케 한 작품이다. 돌과 철판이란 만남을 통해 물질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지각은 물론 이들의 관계성에서 도드라진 새로운 물질성을 향한 관심을 끌어내고 있다. 특히 철판은 인간과 돌의 중간항이 돼, 나와 타자를 연결하는 통로의 역할을 한다. 돌·철, 23×50.3×4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의구심이 들 수 있다. “정말 이런 게 미술일까.” 이런 의문이 생기는 것은 근대미술의 기준이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어서다. 우리에게 익숙한 미술의 개념은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으로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얼마나 닮았는가, 또는 얼마나 아름다운가가 미술작품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곤 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현실을 재현하는 능력이 더는 미술가만의 능력이 아니게 됐다.
아름다움의 기준 역시 상대적으로 변했다. 결과적으로 미술은 단순한 시각적 재현을 넘어 개념, 사유, 과정을 중시하게 됐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이우환은 기존의 기술 또는 아름다움 중심의 미술개념을 넘어서는 작업을 했다. 물론 낯설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시대가 달라지면 미술의 기능과 역할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개인적인 취향은 그대로 두더라도 “이것 또한 예술일 수 있다”는 열린 태도는 이우환을 비롯한 여러 동시대 작품을 이해하는 첫걸음이 된다.
그렇다면 조금 더 마음을 열고 이우환의 회화작품을 보자. 그의 또 다른 대표연작인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등은 설치가 아닌 회화지만 역시 ‘관계항’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1973년부터 이어진 이 연작은 눈으로 보기에는 ‘점’과 ‘선’만으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단순해 보이는 이 추상화에도 역시 그의 철학이 담겨 있다. 앞서 설치작품에서 돌과 철판의 관계로 작품과 관람자 사이의 관계를 탐구했던 것처럼 회화에서도 점과 점, 선과 여백, 작가와 작품·관람자 사이의 관계를 사유한다. ‘점과 점의 관계’ ‘선과 화면의 관계’ 더 나아가 ‘화가와 세계의 관계’를 바라보는 과정인 것이다.
이우환의 ‘동풍 84011003’(1984).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연작을 거치면서 변화한 작품양식 중 하나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작가는 화면을 뭉개는 방식으로 작업하는데 점과 선의 정연한 질서는 무너지고 회화의 해체 현상이 나타난다. 이전 점·선으로 양식화한 형식에서 벗어나 양식이 없는 무의 회화를 추구했다. 연작 중 한 점으로, 한국 미술품 경매에서 31억원에 낙찰되며 국내 생존작가 최초로 30억원을 넘긴 ‘동풍’(1984)과는 다른 작품이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227×181㎝.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나아가 이 작품들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함축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이우환에게 점과 선은 단순한 물감자국이 아니다. 점 하나가 찍히는 순간의 압력, 붓에 남아 있는 물감의 양, 손목의 떨림, 작가의 호흡 그 모든 것이 합쳐져 각기 다른 점과 선을 남긴다. 기계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작가의 흔적이다. 짙게 시작해 희미해졌다가 다시 진해지는 점과 선은 시간의 흐름을 기록한다. 조금 거창하게 말해 ‘탄생, 변화, 소멸’이라는 삶의 원리를 담은 거다. 이우환이 이 작품을 설명할 때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호흡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것은 이런 이유다.
그러니 이우환의 작품은 단순히 화면의 표면만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사유 과정과 철학 그 전부다. 바로 이것이 단순해 보이는 그의 작업을 묵직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소다.
한국 미술계에 이우환이 미친 영향도 상당하다. 1969년부터 이우환은 글을 통해 일본의 현대미술을 국내에 소개하고 자신의 이론을 설파했다. ‘관계항’ 같은 설치미술과 그 이론적 토대는 당시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개념적인 미술작업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다.
“살아 있는 블루칩”…작품 이면 철학·영향력 작용
추상화에도 마찬가지다. 1968년 ‘한국현대회화전’에서 이우환은 크고 넓은 종이에 형광 분홍색 도료를 바른 작품을 선보였는데, 이는 당시 한국 미술계에 적잖은 충격을 줬다. 원로작가 유영국(1916∼2002)은 “이게 무슨 회화냐”고 격한 반응을 보였지만 오히려 그 충격은 젊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줬던 것이다. 특히 박서보(1931∼2023)를 비롯한 후대의 단색화 작가들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회화도 회화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작가 이우환. 사진작가 육명심(1933∼2025)이 1972년부터 제작한 ‘예술가의 초상 시리즈’ 중 ‘이우환’(2009·2021 인화)이다. 예술가로서의 완벽한 순간 대신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긴 평범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포착했다. 종이에 디지털잉크젯프린트, 76.2×50.7㎝.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이우환은 또한 한국과 일본, 두 미술계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일본의 평론가와 화랑 대표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해 국내 미술 관계자들을 만났고, 이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은 일본에, 한국의 미술가들은 일본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처럼 그가 한국미술에 끼친 영향은 상당했다.
미술사가 한 작가를 평가할 때는 그의 작품뿐만이 아니라 그 뒤에 담긴 철학과 미술계에 미친 영향까지 고려한다. 특히 당대와 후대 미술사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다. 그렇기에 한국미술의 개념적 지평을 넓힌 사상가이자 선구자였다는 점이 이우환을 높이 평가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이우환이 ‘살아 있는 블루칩’으로 불리는 이유는 작품 자체뿐만 아니라 그 이면의 철학과 발자취에도 있다. 미술은 분명 눈에 보이는 것을 다루는 시각예술이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 너머를 볼 때 비로소 그 진정한 가치가 드러난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그 역설이 곧 시각예술의 묘미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