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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가에 계엄군 총알이 스쳤다… "여기서 같이 죽자" 광주로 간 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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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과 검열]③ 광주로 간 기자들
1980년 5월 19일 영문 모르고 광주로 급파
귓가 스친 계엄군 총알, 마음 다친 시민 분노
'피의 초파일' 기록물·필름 서울로 보냈지만
검열로 난도질 되는 현실에 무력감만 커져가

편집자주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지난해 12월 3일 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 포고령 제3항은 권력이 언론을 암전한 45여년 전의 악몽을 떠오르게 했다. 역사는 돌고 돌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격언을 상기시킨다. 독재 권력이 등장할 때, 가장 먼저 장악하려는 것이 언론이며 언론인은 독재자의 탄압과 가해를 가장 혹독히 겪는 직업군이다.
한국일보는 12·3 불법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1980년 전후 권력이 지운 352개의 기사를 발굴해 뒤늦게 독자들께 배달하면서, 비록 기사를 신문에 싣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취재하고 처절하게 맞섰던 당시 본보 기자들의 증언을 모으고 기록했다.


조성호(왼쪽부터), 유동성, 박태홍 전 한국일보 기자가 각각 지난달 21일과 25일 서울과 전북 전주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며 과거 신군부 독재 정권 당시 검열돼 실리지 못한 5·18 광주 기사와 사진을 복원해 만든 '가상의 지면(1980년 5월 30일 자)'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지면은 한국일보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민경석 기자

조성호(왼쪽부터), 유동성, 박태홍 전 한국일보 기자가 각각 지난달 21일과 25일 서울과 전북 전주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며 과거 신군부 독재 정권 당시 검열돼 실리지 못한 5·18 광주 기사와 사진을 복원해 만든 '가상의 지면(1980년 5월 30일 자)'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지면은 한국일보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민경석 기자


1980년 5월 28일 땅거미가 내려앉은 서울. 8년 차 기자 조성호(당시 36세)는 몹시 지쳐 기진맥진했다. 계엄군이 들이닥친 5월의 광주를 취재하겠다고 그곳에서 아홉 밤이나 잔 뒤 버스로 막 상경한 참이었다. 오는 내내 눈을 감을 때마다 끔찍한 광경이 떠올라 눈에 벌건 핏발이 섰다.

하지만 당장 몸 누이는 것보다 급한 게 따로 있었다. 성호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광주에서 함께했던 채의석 캡(사건팀장·당시 39세), 사진부 김용일(당시 36세)·박태홍(당시 37세)과 종로구 중학동 한국일보 편집국으로 직행했다. 열흘 만에 얼굴을 보는 동료들을 그대로 지나쳐, 그동안 나온 신문부터 허겁지겁 펼쳐 들었다.

잠깐만, 이게 다 뭐지. "계엄군이 광주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왔으나 극렬한 폭도들에 의해 호전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는 조짐을 보였다." "시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군을 투입하게 됐다." (1980년 5월 28일 자 1면)

숨이 턱 막혀 그대로 기절할 것 같았다. 신문 어디에도 시민을 살상한 계엄군 얘기가 없다. 빼곡히 적어 올려 보냈던 취재 메모는 다 어디로 간 건가. 죄 없는 시체와 통곡으로 지옥이 된 거리는? 총칼로 시민을 짓밟던 계엄군의 민낯은?

광주의 비극이 없던 일이 돼버렸다니. 한 치 앞도 모르고 광주로 내려갔던 열흘 전 그날이 방금 전처럼 생생하기만 한데. 성호는 이 모든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조성호 전 한국일보 기자가 지난달 21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본보와 인터뷰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아래). 위 사진은 조 전 기자가 현직에서 일할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 민경석 기자

조성호 전 한국일보 기자가 지난달 21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본보와 인터뷰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아래). 위 사진은 조 전 기자가 현직에서 일할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 민경석 기자


노동청 기자와 견습기자가 탄 광주행 막차


"네가 얼른 내려가 봐라."

열흘 전으로 거슬러 19일, 김해도 사회부장(당시 42세)은 대뜸 경찰팀도 아닌 노동청 담당 성호를 회사로 불러 광주로 가라는 급명을 내렸다. 원래 현장을 도맡아야 할 경찰팀이 죄다 서울 대학생 시위에 투입된 탓이었다. 대학생티도 못 벗어 앳된 얼굴에, 전라도 억양이 묻어나는 견습기자 유동성(당시 24세)이 동행이랍시고 따라붙었다.


아직 훤한 대낮이었는데도 버스 터미널 직원은 광주행 고속버스가 이번 것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앞으로는 광주 가는 버스가 없을 거라면서. 둘은 영문을 모른 채 일단 막차에 몸을 실었다.

저녁 8시 30분이 넘어 사위가 어두워졌다. 버스는 광주 시내에 들어가기도 전에 멈춰 서더니 승객들더러 내리라고 했다. 비까지 내리는 통에 시내로 뛰어가던 중 코끝으로 지독한 탄내가 훅 끼쳤다. 앞을 보니 곳곳에서 대형트럭이며 자동차 여러 대가 활활 타는 불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뉴스에서나 보던 전쟁통 같은 광경에 성호와 동성은 눈을 의심했다.


20일 날이 밝자마자, 성호는 비상계엄이 선포된 17일 이후 지금까지의 일을 광주 주재기자에게 들어 재구성했다.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을 계엄군이 무차별 난타하고 대검으로 난자하기까지 했단다. 병원은 이미 출혈이 큰 부상자로 초만원이었다.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했다.


21일로 넘어가는 새벽, 상황은 더 험악해졌다. 시내 한복판에서 불길이 솟아 사태 파악을 위해 성호·동성이 중심 거리인 금남로를 건너던 중, '탕'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혼비백산해 납작 엎드리던 순간 동성은 귓가로 '피빙' 하고 뭔가가 빠르게 지나가는 걸 느꼈다. 총알이었다. 하늘을 향해 쏘는 공포탄이 아닌 사람을 향한 조준 사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유동성 전 한국일보 기자가 지난달 25일 전북 전주시의 한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오른쪽). 왼쪽은 유 전 기자가 5·18 광주 현장으로 급파되기 불과 몇 달 전인 1980년 봄 무렵 모습을 찍은 사진. 전주=민경석 기자

유동성 전 한국일보 기자가 지난달 25일 전북 전주시의 한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오른쪽). 왼쪽은 유 전 기자가 5·18 광주 현장으로 급파되기 불과 몇 달 전인 1980년 봄 무렵 모습을 찍은 사진. 전주=민경석 기자


아군이 아무도 없는 종군 기자


시위대는 기자를 절대 지켜주지 않았다. 오히려 기자인 게 발각되면 취재 수첩부터 수송차까지 빼앗는 게 예사였다. 그건 언론사들의 업보이기도 했다. 사태 사흘 만에 광주 시민들은 군부 자료를 받아쓰기만 하는 국내 언론에 처절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둘은 기자라는 걸 철저히 숨겨야 했다. 금남로 취재를 위해 광장 한복판에 선 성호는 딴청 피우는 척 먼 산에 시야를 뒀다. 그 상태로 인파를 추산하고 "몇 시, 몇 분, 어느 광장에 몇 명" 따위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면 동성은 두어 발 떨어진 곳에서 옆구리에 수첩을 숨긴 채 성호가 사방을 묘사하는 말을 모두 받아 적었다.

21일 채의석과 함께 후발대로 내려온 박태홍도 22일 광주 시내에 진입하자마자 시위대에 카메라를 뺏겼다. 반면 시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카메라를 들고 지프차로 현장을 누비는 외신 기자를 보고 있자면 금세 서글퍼졌다. 동성은 자신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고 45년이 지나서야 털어놨다.


"내 처지가 종군 기자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어요. 고립무원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그런데 아군이 아무도 없는 종군 기자요."

박태홍 전 한국일보 기자가 지난달 21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본보와 인터뷰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오른쪽). 왼쪽 사진은 박 전 기자의 5·18 광주 현장 취재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 민경석 기자

박태홍 전 한국일보 기자가 지난달 21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본보와 인터뷰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오른쪽). 왼쪽 사진은 박 전 기자의 5·18 광주 현장 취재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 민경석 기자


‘피의 초파일’이 적힌 종이 뭉치


그해의 초파일(부처님 오신 날)이던 21일 낮에도 성호와 동성은 금남로 시위대 속에 섞여 있었다. 그때 또다시 귀를 찢는 듯한 '탕' '탕' 소리. 금남로를 빼곡히 채운 수만 명이 반으로 쫙 갈라지더니 가운데에 길이 났다. 머지않아 시위대 일원 하나가 피 흘리는 시민을 업고 다급히 길을 따라 뛰어나왔다. 업혀 나오는 사람이 하나, 둘 늘더니 순식간에 십수 명으로 늘었다. '피의 초파일'이 그렇게 시작됐다.

총 맞은 사람을 처음 본 동성은 일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그것도 잠시, 총상자가 실려 간 병원으로 곧장 뛰었다. 시민과 의료진에게 간청해 가며 부상자 명단을 조금씩 알아냈다. 주위에 보이는 아무 전화기나 붙잡고 선배들에게 전화를 걸어 명단을 읊었다.

사실 이런 식의 연락마저도 급격하게 불가능해지고 있었다. 광주 소식을 밖으로 내보낼 만한 전화, 차편이 이날을 기점으로 빠르게 끊겨갔다. 이대로라면 취재한 게 모조리 소용없어질 판이었다. 성호는 아비규환 속에서 동성을 찾아내, 보물처럼 지켜온 취재 메모 묶음을 품에 안겨주며 말했다. "빨리 광주를 빠져나가라."

'피의 초파일'이라 불리는 1980년 5월 21일, 광주 금남로 주변 골목에서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의 시가전이 벌어진 가운데 시민들이 벽에 붙어 선 채 피신해 있다. 한국일보 임시취재반

'피의 초파일'이라 불리는 1980년 5월 21일, 광주 금남로 주변 골목에서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의 시가전이 벌어진 가운데 시민들이 벽에 붙어 선 채 피신해 있다. 한국일보 임시취재반


얼떨결에 중책을 맡은 동성은 가방에 취재 메모를 고이 넣었다. 일단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유일한 통로인 송정리로 나갔다. 지나가던 남의 차를 무작정 얻어 타, 전남과 전북의 경계인 고창리까지 어찌저찌 당도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이미 도로를 가로질러 삼엄한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군인이 기다렸다는 듯 동성을 막아서더니 날 선 말투로 질문을 쏟아냈다. "어디 갔다 오느냐." "신분증을 내라."

기자증을 들켰다간 사달이 날 게 뻔했다. 동성은 애써 태연한 척 대학 학생증을 내밀었다. "광주 친척집에 갔다가 상황이 안 좋아서 나갑니다." 군인은 아랑곳 않고 동성의 가방을 뒤졌다. 취재 메모는 겉보기엔 그저 종이 뭉치에 불과했다. 정체를 눈치 못 챈 군인은 그대로 동성을 통과시켰다.

전북부턴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가 다녔다. 동성은 잠시 전주 본가에 들러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고, 곧바로 본사로 가 취재 메모를 전달했다. 이후 동성은 경찰서를 뻔질나게 드나드는 견습기자의 일상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그런 와중에 수시로 광주의 참극이 생각나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적십자병원에 늘어서 있던 관들. 그 관을 붙잡고 오열하느라 일그러진 얼굴들.

계엄군에 의해 광주의 전남도청이 함락된 27일 기자들이 광주 도심으로 진출하는 계엄군의 탱크를 촬영하고 있다. 한국일보 임시취재반

계엄군에 의해 광주의 전남도청이 함락된 27일 기자들이 광주 도심으로 진출하는 계엄군의 탱크를 촬영하고 있다. 한국일보 임시취재반


"이것도 신문이여?"


24일, 피비린내 가득한 광주에선 성호와 후발대가 취재를 이어갔다. 별안간 의석이 태홍에게 말했다. "사회부장과 사진부 차장이 내려왔다고 하니 가봐." 모든 교통이 끊긴 와중 그 둘은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했다. 태홍이 짐작건대, 군부가 회유·압박 목적으로 언론사 인사들을 비행기에 태워 상공에서 광주 시내를 보여준 것 같았다. 어쨌거나 선임들을 만나다니 태홍은 일단 반가웠다.

그런데 선임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곤란하다는 듯한 근심이 드리워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부장은 "술값 하라"며 용돈과 함께 그날 발행된 신문을 쥐여주곤 떠났다. 교통이 끊겼으니 신문 배달도 안 돼 광주 상황이 어떻게 보도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던 차였다. 태홍은 당장 갈증을 풀고 싶은 사람처럼 신문을 살폈다.

한국일보 1980년 5월 24일 자 1면 지면. '광주 대책기구 중심 수습 노력'이라는 큰 제목하에 광주 사태가 밝은 전망을 보이고 있다는 계엄사 측 주장이 실려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일보 1980년 5월 24일 자 1면 지면. '광주 대책기구 중심 수습 노력'이라는 큰 제목하에 광주 사태가 밝은 전망을 보이고 있다는 계엄사 측 주장이 실려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금까지 사력을 다해 본사로 보냈던 취재 내용이 눈 씻고 봐도 없었다. 오히려 1면에는 "전남도청 기능이 회복돼 광주 사태가 밝은 전망을 보인다"는 계엄사의 거짓 발표가 실려 있었다. 태홍은 당혹감과 비참함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신문을 챙겨 광주 지사로 갔다. 직원 박씨에게만 슬쩍 보여줬더니 박씨가 말했다. "이것도 신문이여? 이것이 (광주로) 배달됐으믄 지사가 다 타 버렸을 것이제." 그러게. 도저히 광주 시민에게 내보일 수 없는 이 괴상한 걸 신문이라 할 수 있나. 다행인지 뭔지, 태홍이 신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성호와 의석은 이런 상황조차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광주 참상이 고스란히 담긴 카메라 필름을 썩힐 순 없었다. 그나마 전남 장성에선 서울행 시외버스가 다녔다. 25일 태홍은 지사 자전거를 빌려 타고 두 시간이 넘도록 장성으로 내달렸다. 버스 기사에게 부탁해 필름을 맡긴 뒤, 본사에 전화해 서울 버스 터미널에서 필름을 받아 달라고 당부했다. 장성에서 하루 묵은 뒤, 26일 태홍은 다시 광주로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시각물_5.18 광주 민주화 운동 시간순 정리. 그래픽

시각물_5.18 광주 민주화 운동 시간순 정리. 그래픽


"우리가 여기에서 같이 죽자"


태홍이 광주 초입에 다다르자 어제까진 없던 바리케이드가 생겨 있었다. 그곳을 지키던 군인은 문득 태홍에게 측은지심이 들었는지 "곧 계엄군이 들이닥칠 테니 들어가지 말라"고 귀띔했다. 공수부대를 시내에 투입하는 최종 진압작전을 말하는 것이었다. 군인의 눈빛을 보니 이 걱정은 진심이었다. 이대로 광주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

태홍은 흔들렸다. 그렇다고 혼자 도망칠 순 없었다. 고민 끝에 군인에게 "동료를 다 데리고 나오겠다"고 답하고는 그들이 모여 있는, 전남도청 인근의 황금식당으로 달려갔다. 사람이 떼로 죽어 나가는 광주에서 맨정신으로 버틸 수 없던 취재반은 매일 밤 셔터를 내린 그곳에 모여 조용히 소주를 마시곤 했다.

태홍이 다급하게 말했다. "오면서 얘기를 들어보니 밤중 틀림없이 계엄군이 온다고 합니다. 오늘 밤만 광주를 떠났다가 다시 옵시다." 의석은 표정도 안 변한 채 입을 뗐다. "안 된다." 일언지하에 거절이었다. "광주 지사도 우리 식구다. 우리가 여기에서 같이 죽자. 너는 가고 싶으면 가라."

1980년 5·18 광주 사태를 취재하기 위해 임시취재반으로 현장에 파견된 채의석 당시 한국일보 사건팀장의 모습. 박태홍 전 한국일보 기자 제공

1980년 5·18 광주 사태를 취재하기 위해 임시취재반으로 현장에 파견된 채의석 당시 한국일보 사건팀장의 모습. 박태홍 전 한국일보 기자 제공

결국 태홍을 포함한 취재반이 그대로 머무른 광주에는 27일 새벽, 군인이 예고한 대로 공수부대가 들이닥쳤다. 무자비한 총소리가 쉬지 않고 천둥처럼 새벽 공기를 갈랐다. 막상 누구도 차마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정말 오늘 죽을까 봐 무서워서. 태홍은 팔순이 넘은 지금도 공포에 발이 묶였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통한의 눈물이 절로 흘렀다.

"원래는 밖으로 나가야죠. 그런데 안 나갔으니 그날 현장 사진이 없죠. 나를 포함해서 기자 아무도 중상을 입은 사람이 없다는 게, 비애라면 비애인 거죠."

검열의 난도질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 28일, 서울로 귀환한 성호를 향해 선후배들은 공허한 위로를 전했다. 후배 신연숙(당시 26세)은 "고생해서 취재했는데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어떤 선배는 술을 사주면서 "당분간 광주 다녀온 사실을 말하고 다니지 말라"고 조언했다. 광주의 비극을 목격했다는 것 자체로 해직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부장은 "다녀온 얘기를 대강 일지식으로 써보라"고 했다. 주제도 정하지 말고, 시민들이 죽고 다친 사실은 완곡하게 바꿔서. 이 일을 어떻게 완곡하게 표현할 수 있나. 성호는 어이없는 심정으로 초고를 썼다. '피의 초파일'을 떠올리면 먹먹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금남로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인해 추정으로 150~180명이 죽었다"고 나름대로 간결하게 적었다. 그마저 부장 손을 거쳐 "군대와의 충돌 과정에서 총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상했다"로 허무맹랑하게 바뀌었다.

1980년 5월 20일 광주 금남로에서 투석전이 벌어진 직후 한 청년이 나뒹굴고 있다. 주변 계엄군의 서슬에 겁을 먹은 여성은 그를 도울 수도, 지나칠 수도 없다. 무자비한 진압은 그 후로도 계속됐다. 임시취재반

1980년 5월 20일 광주 금남로에서 투석전이 벌어진 직후 한 청년이 나뒹굴고 있다. 주변 계엄군의 서슬에 겁을 먹은 여성은 그를 도울 수도, 지나칠 수도 없다. 무자비한 진압은 그 후로도 계속됐다. 임시취재반


다음 단계는 서울 시청에 자리한 군부 검열단이었다. 검열 담당 군인은 기사 대장에 광주 내용이 담긴 것 자체에 기겁을 하더니 문장마다 벅벅, 가차 없이 '보도 불가'를 뜻하는 줄을 그었다. 그 힘에 남아나지 못해 너덜너덜해진 대장을 받아 들고 성호는 그저 허탈했다. 그대로 구겨 휴지통에 던져 넣고는 빈손으로 회사에 돌아갔다.

"뭘 지웠는지를 알아야지, 그걸 왜 버리고 오냐"는 핀잔을 들었다. 하지만, 그걸 챙겨와서 도대체 뭘 한단 말인가. 핵심이 숭숭 빠져 뭔 소린지도 모르는 기사를 낼 바엔 차라리 안 쓰는 게 나았다. 성호는 한없이 무력해졌다.

앞서 비슷한 일이 동성에게도 있었다. 취재반이 상경하기 전, 부장은 홀로 먼저 복귀해 있던 동성을 조용히 불러 "취재 메모를 모아 기사를 쓰라"고 지시했다. 동성은 내내 잔상처럼 따라다녔던 병원의 관들과, 관조차 없어 거리에 널린 사망자들 얘기를 기다렸다는 듯 적어내렸다.

하지만 부장은 검열단을 미리 의식한 듯 기사를 고쳤다. 죽은 시민들 분량은 다 들어냈다. 생필품이 없어 고역인 사람들, 진통제가 동난 약국, 폐차장이 된 자동차 공장 정도가 살아남았다. 기사를 내밀더니 부장이 말했다. "검열단에 직접 가서 설명을 잘 해봐라, 네가 썼으니까."

검열 담당이던 공군 대위는 동성이 보는 앞에서 관성에 젖은 손으로 기사 곳곳을 어김없이 난도질했다. 검열이 다 끝나고 보니 원문의 3분의 1도 안 남은 것 같았다. 부장이 다 고친 기사마저 이 모양이 되다니.

울컥한 동성은 "목숨 걸고 이 글을 작성한 기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어 군부를 논평한 것도 아니요, '북한 사주'나 '간첩'도, '계엄군 발포'도 언급한 적 없다며 호소 아닌 호소를 했다. 고민하던 대위는 사무실 안쪽의 널찍한 의자에 앉아 있던 검열단장에게 대장을 가져가더니 5분이 넘도록 의논한 끝에 분량 일부를 되살려줬다.

한국일보 1980년 5월 28일 자 7면 지면. '광주 시급한 생필품 공급'이라는 제목으로 유동성 전 한국일보 기자가 쓴 기사가 실려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일보 1980년 5월 28일 자 7면 지면. '광주 시급한 생필품 공급'이라는 제목으로 유동성 전 한국일보 기자가 쓴 기사가 실려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8일 자 신문 7면의 상단. 원문의 3분의 2가량만 남은, 동성의 첫 기사가 실렸다. 부장은 "전 신문 통틀어 광주 상황을 이렇게 자세히 적은 기사는 처음일 것"이라고 자평하면서 마음의 짐을 조금 덜었다. 동성은 미약하게나마 광주의 상흔을 손수 남긴 그 기사를 스크랩해 오래도록 보관했다.

6개월 견습기간을 마친 동성은 5월의 광주를 겪은 후 목포 주재기자로 발령 났다. 취재하고도 신문에 싣지 못한 건, 5월 광주만이 아니었다.

몇 달 후 목포와 신안 일대에 콜레라가 창궐했다.

<4회에서 계속>

목차별로 읽어보세요

  1. ① 46년 만의 보도
    1. • 46년 전 겨울 내란의 밤, 이제야 그 기사를 배달합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314400001938)
    2. • 46년 전 계엄 때 삭제된 기사 352개, 어떻게 입수했나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916320001408)
    3. • "탕탕탕···" 밤새 취재한 '쿠데타의 밤' 기사 지워지고, 검열 지옥이 열렸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1914530005155)
    4. • "박정희, 서울에 발포 명령 계획" 김재규 최후진술 보도, 전두환의 가위질로 삭제됐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720520001460)
  2. ② 해고, 농성, 고문
    1. • "고문 기술자가 미안해 할 정도로 모진 고문" 전두환 '왕' 만들기에 1000명 넘게 스러졌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1909450005795)
    2. • 간첩 잡던 군인이 언론인 때려 잡았다…감금한 채 "각서에 지장 찍어라"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422270000884)
    3. • "눈물 젖은 신문" "계엄해제 만세!" 꼿꼿했던 만평··· 삭제 45년 만에 전합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3015350001829)
    4. • "공산주의 국가나 언론통폐합" 부인하던 신군부, 두 달 뒤 현실됐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514510000555)
    5. • 5·18 삭제 기사로 되살려낸, 가상의 '한국일보 1980년 5월 신문'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20216210004715)
  3. ③ 광주로 간 기자들
    1. • 기자 귓가로 '피잉' 지나간 총알··· 광주서 서울로 보낸 '피의 초파일' 취재메모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015050001117)


최은서 기자 silver@hankookilbo.com
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유대근 기자 dynam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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