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이후 권력 공백…민주화 열망 분출
전두환 신군부, 정치 검열 '3대 타깃' 설정
포고령 악용하고 정치 기사 '난도질' 난무
'김대중' 이름 못 써 '재야의 모 인사' 표현
'김재규 동정론'에 최후진술 등 삭제 조치
직선 개헌 논의 삭제…전두환 집권의 길로
편집자주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지난해 12월 3일 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 포고령 제3항은 권력이 언론을 암전한 45여년 전의 악몽을 떠오르게 했다. 역사는 돌고 돌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격언을 상기시킨다. 독재 권력이 등장할 때, 가장 먼저 장악하려는 것이 언론이며 언론인은 독재자의 탄압과 가해를 가장 혹독히 겪는 직업군이다.
한국일보는 12·3 불법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1980년 전후 권력이 지운 400개의 기사를 발굴해 뒤늦게 독자들께 배달하면서, 비록 기사를 신문에 싣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취재하고 처절하게 맞섰던 당시 본보 기자들의 증언을 모으고 기록했다.
재판 받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
1979년 10월 26일 밤 이후 대한민국은 최고 권력의 진공상태에 놓인다. 김재규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시해하면서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기적 같은 경제성장을 이끌었지만 장기 독재로 민주주의를 질식시켰던 지도자. 그가 떠나자 사회 각계에서 애도의 목소리와 함께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분출됐다.
그러나 '서울의 봄'(10·26사건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이 커진 시기)은 길지 않았다.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중심이 된 신군부는 언론 보도의 사전 검열 등을 통해 마뜩찮은 정보가 퍼지는 걸 막았다. 10월 27일 선포한 비상계엄령 포고령의 '언론, 출판, 보도는 사전에 검열을 받아야 한다'는 조항을 악용한 것이다. 명분은 '사회 안정'이었지만 실제로는 전두환을 새 최고 권력자로 옹립하려는 기초 작업이었다.
한국일보가 이민규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로부터 입수한 1979년 10월~1981년 1월 비상계엄 당시 검열 삭제 기사 352개 중 정치 기사를 분석한 결과, 신군부는 정치적으로 '3대 타깃'을 설정해 지운 사실이 확인됐다. ①김대중·김영삼 등 야권 정치 지도자 ②10·26과 12·12 ③개헌 논의였다.
"'김대중' 이름 석자는 거론도 하지 마"
신군부는 야권과 재야 정치 지도자들이 대안 세력으로 떠오르는 걸 매우 경계했다. 대표적 인물이 훗날 14·15대 대통령이 되는 김영삼과 김대중이다. 전두환에게 두 거목은 자신의 집권 시나리오를 방해할 가장 위험한 장애물이었다.
특히 김대중은 존재 자체를 도려 내려 했다. 이 교수는 "신군부가 가장 미워했던 사람을 꼽자면 김대중"이라며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여긴 데다 과거 박정희와 대선에서 붙어 박빙 승부를 벌였던 기억이 있기에 국민의 머릿속에 이름조차 지워버리려 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당시 군부가 삭제한 기사 중에는 김대중의 소식을 다룬 게 많았다. 예컨대 한국일보는 1980년 3월 19일 김대중이 서울 동교동 자택에서 기자들을 만나 밝힌 내용을 기사로 썼으나 이는 통째로 삭제됐다. '국정을 비방했다'는 이유였다. 김대중은 당시 "최근 과도 정부 지도자들의 발언과 움직임을 지켜보면 그들이 당초 약속대로 새로운 민주 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차기 정권에 참여하려는 것인지 저의가 불투명하다"는 취지로 말했다.
1979년 5월 31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새 총재로 선출된 김영삼(오른쪽)과 재야 지도자였던 김대중이 함께 서울 노량진의 한 약국에 들러 약을 사며 대화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김대중'이라는 이름 자체를 못 쓰게 하니 기자들은 검열을 피할 방법을 고민했다. 궁리 끝에 찾아낸 표현이 '재야의 모 인사'였다. 하지만 신군부는 이마저도 삭제했다. 김영삼(당시 신민당 총재)은 1981년 1월 한국일보의 자매지인 '주간한국'과 인터뷰했는데 기자가 "재야 모 인사와 김 총재의 사이를 두고 앞으로 어떤 관계가 이뤄질까 궁금증이 없지 않다"고 묻자 "이런 저런 말이 있지만 그 분과 이견이 없다. 누가 대통령을 하느냐보다 천배 만배 중요한 게 민주주의니까 서로 협력하는 관계이지 라이벌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군부는 이 부분을 신문에서 지우도록 했다.
김영삼을 다룬 기사도 곧잘 삭제당했다. 1980년 초 한국일보에 입사한 김주언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은 "당시 편집국(기자들이 일하는 사무실) 칠판에는 군부의 검열 지침이 적혀 있었는데 '야당 총재 김영삼이 투쟁한 이야기는 전혀 쓰지 말라'고 했다"고 전했다.
1980년 1월 게재 예정이었던 주간한국의 김영삼 신민당 총재 인터뷰 중 한 대목. 재야 인사인 김대중과 관계에 대해 답하고 있다.(붉은 박스 부분) 유대근 기자 |
"아빠를 살려주세요" 초등생 딸 편지도 지워졌다
10·26 사건과 12·12 군사반란도 취재한 대로 보도할 수 없었다. 신군부는 10·26 사건에 대해서는 입맛에 맞는 내용만 보도할 수 있게 하고, 거슬리는 부분은 도려냈다.
예컨대 한국일보는 1980년 1월 27일 자 신문에 내란목적살인 등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김재규의 최후진술을 내보내려 했다. 기사 초안에는 김재규가 말한 "유신 7년 동안 체제에 항거하는 국민의 생각이 누적되다 부마사태(1979년 10월 부산·마산 지역에서 발생한 유신 항거 시위)가 일어났고 이는 삽시에 다른 대도시로 확산될 판이었다" "(부산의 상황을)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니 박 대통령이 '앞으로 서울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했다)" "나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게 해달라, 내 죽음을 우리나라의 불안요인으로 만들지 말라" 등의 발언이 담겼다. 검열 세력은 이를 삭제했다. 대역죄인을 옹호하고 전임 대통령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를 들었다.
신군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의 최후진술을 보도하지 못하게 했다. 대역죄인을 옹호하고, 전임 대통령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사진은 검열단이 당시 일간지에서 관련 내용을 삭제 조치한 뒤 작성한 보고서. 유대근 기자 |
한국일보는 1979년 12월, 김재규의 부관으로 10·26 사건에 가담했던 박흥주 대령의 초등학생 딸이 "아버지를 살려달라"며 쓴 손편지 내용을 보도하려 했으나 이 또한 삭제당했다. 당시 한국일보 기자였던 채의석은 신군부의 검열 실태를 폭로한 책 '99일간의 진실'에서 "(유신체제의 종지부를 찍은) 김재규를 의사로 떠받들어야 한다는 항간의 동정이 쏠리자 신군부는 이를 불안 요소로 간주했다"며 "박정희의 장학생이었던 신군부는 그의 위상을 손상시킬 일체의 격하 움직임을 극렬 저지했다"고 회고했다. 군사독재 정권의 권위가 추락하면 신군부의 앞날에도 득될 게 없다고 판단했다는 얘기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부관 박흥주 대령의 초등학생 딸이 쓴 편지 내용을 다룬 한국일보 기사. 1979년 12월 신문에 게재될 예정이었으나 신군부 검열단이 삭제하도록 해 결국 보도되지 못했다. 유대근 기자 |
전두환과 하나회 소속 장성들이 벌인 12·12 군사반란은 더 철저히 지웠다. 12일 당일 상황을 기록한 한국일보 기사 네 편을 통째로 삭제시킨 것을 비롯해 '정부가 12·12사건은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이 군 수사권 발동에 저항해 생긴 일이라고 주한 미국대사관에 설명했다'는 보도(1979년 12월 18일자 게재 예정) 역시 신문에서 빼도록 했다. 이 내용은 2021년 7월, 미국 외교문서가 기밀해제되면서 알려졌다. 신군부가 보도를 가로막은 까닭에 진실이 드러나는 데 42년이나 걸린 것이다.
신군부는 동시에 전두환의 야욕이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한국일보는 1980년 7월 27일자 신문에 전두환이 미 워싱턴포스트와 한 인터뷰 주요 내용을 싣으려 했다. 인터뷰를 한 돈 오버도퍼 특파원은 기사에서 "전두환 장군은 그가 군을 떠나 내년 봄 대통령에 출마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병영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단순한 군인이라는 종래의 주장을 되풀이하지 않았다"고 썼다. 전두환이 대통령 출마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검열단은 이를 삭제하라고 했다. 권력 찬탈 의지가 우리 국민과 미국 등에 일찍 알려지면 집권에 문제가 생길까 봐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은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1980년 8월27일 '체육관 선거'(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진행한 간접선거)에서 99.4%의 득표율로 대통령이 된다.
전두환이 1981년 3월 3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12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모습. 오른쪽에 서서 그를 바라보는 사람은 부인인 이순자(흰옷 입은 여성)다. 전두환은 1980년 8월, 유신헌법에 따라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헌법을 고쳐 이듬해 12대 대통령으로 재차 취임했다. |
도둑 맞은 직선제 개헌
유신 독재가 끝난 뒤 봇물처럼 터져나왔던 개헌 목소리도 철저히 지워졌다. 민주화의 희망이 커지자 야당과 재야 그룹뿐 아니라 여당인 민주공화당도 개헌 논의에 참여했다. 특히 체육관 선거 대신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는 직선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열망이 강했다. 하지만 국가 권력을 찬탈하겠다는 야욕이 컸던 전두환의 신군부는 이런 논의가 국민에게 전해지지 못하도록 막았다.
한국일보는 1979년 11월 야권의 한 고위 인사가 밝힌 개헌에 대한 입장을 기사로 썼다. "(유신체제를 끝내고) 제4공화국을 설계할 때 △1인 장기집권을 막는 제도를 보장해야 하며 △대통령 직선제를 채택하고 △사법부 독립 등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이 인사는 계엄군도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며 언론을 검열하고 야당을 탄압하는 인상이 있다는 점도 꼬집었다. 검열단은 이 기사를 전면 삭제했다.
1979년 11월 한 야권 인사가 밝힌 개헌에 대한 입장을 담은 기사 내용 요약. 신군부는 이를 보도하지 못하도록 했다. 유대근 기자 |
그리고 전두환은 내란이었던 5·17 비상계엄 확대로 국회 기능을 정지해 직선제 개헌안을 폐기시켰고 정부 주도로 헌법 개정 작업을 벌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 헌법이 1980년 10월 공포된 '제8차 개정 헌법'이었는데 대통령을 간선제로 뽑고, 대통령 임기를 7년으로 하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전두환은 이 헌법을 근거로 약 7년간 집권한다.
1979년 10월~1981년 1월 주요 정치 사건 . 그래픽=송정근 기자 |
- ① 46년 만의 보도
- • 46년 전 겨울 내란의 밤, 이제야 그 기사를 배달합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314400001938) - • 45년 전 계엄 때 삭제된 기사 352개, 어떻게 입수했나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916320001408) - • "탕탕탕···" 밤새 취재한 '쿠데타의 밤' 기사 지워지고, 검열 지옥이 열렸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1914530005155) - • "박정희, 서울에 발포 명령 계획" 김재규 최후진술 보도, 전두환의 가위질로 삭제됐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720520001460)
- • 46년 전 겨울 내란의 밤, 이제야 그 기사를 배달합니다
유대근 기자 dynam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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