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간의 무명 시기를 딛고 프로배구 여자부 정관장 주전 세터로 도약한 최서현이 대전 구단 훈련장에서 공을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대전=이한결 기자 always@donga.com |
‘헤맨 만큼 자기 땅이 된다.’
좌절과 위기 속에서도 최서현(20·정관장)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한 문장이다. 헤맨 시간만큼 더 성숙해진 최서현은 이제 새로운 팀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고희진 정관장 감독도 25일 대전 현대건설전을 앞두고 “우리는 경기를 뛰면서 성장하는 게 목표인 팀이다. 그 중심에 최서현이 있다”고 치켜세웠다.
7월 정관장에 합류한 최서현은 팀이 이번 시즌 들어 치른 10경기에 모두 나서 세트(토스) 1015개를 기록했다. 2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최서현은 2023∼2024시즌 프로배구 여자부 신인 드래프트 때 전체 6순위로 현대건설의 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데뷔 시즌 내내 웜업존만 달궜고 두 번째 시즌에도 3경기에 나와 세트 9개를 기록한 게 전부였다. “또래 선수들이 데뷔전을 치르는 걸 볼 때마다 부럽다는 마음밖에 없었어요. 조바심도 나고 주눅도 들었죠.” 결국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현대건설을 떠나야 했다. “정리될 것 같다는 직감은 했어요. 불러주는 팀이 없으면 실업팀이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프로에서 계속 뛰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보수 총액 5000만 원에 정관장 유니폼을 입었다. 그 선택이 최서현의 배구 인생을 바꿔 놓았다. 정관장 주전 세터 염혜선(34)에 이어 김채나(29)마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면서 기회는 자연스럽게 최서현에게로 향했다.
최서현은 9일 대전 페퍼저축은행전이 끝난 뒤 경기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돼 개인 첫 방송 인터뷰도 경험했다. “2년 동안 고생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울음이 터질 뻔했어요.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인터뷰 역할극을 하곤 했거든요. 그게 현실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최근에는 입단 3년 차까지 받을 수 있는 영플레이어상(신인상) 후보로도 거론된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김)세빈이가 알려줘서 알았어요. 그때부터 조금 욕심이 나더라고요.” 최서현과 김세빈(20·한국도로공사)은 한봄고 동기다.
최서현은 스스로 순간 스피드와 공격수들을 골고루 활용할 수 있는 경기 운영 능력을 장점으로 꼽는다. 최서현은 상승세의 비결을 묻자 ‘대화’라고 답했다. “공격수마다 좋아하는 공이 다르고 키도 다 달라서 호흡을 맞추는 게 중요해요. 그래서 경기장에서나 훈련장에서나 말을 많이 하려고 해요.”
최서현의 배구 인생 출발점에는 실업배구 시절 한국도로공사에서 뛰었던 기남이 한국배구연맹(KOVO) 판독위원(53)이 있었다. “요즘은 사후 판독 업무를 하시는데 제 경기를 볼 수밖에 없다 보니 피드백을 자주 주세요. 칭찬보다는 쓴소리가 많지만요(웃음).”
최서현은 초등학교 3학년 여름 어머니 손에 이끌려 배구부를 처음 찾았다. “힘들어 보여 하기 싫다고 했는데 겨울방학 때 또 데려가시더라고요.” 그 뒤에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운동이 너무 힘들어서 점심시간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 적도 있어요. 그날 밤 엄마와 긴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긴 했지만요.”
2022년 봄에는 더 큰 시련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 최서현은 드래프트 때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아버지가 경기 한 번 보지 못하고 가셨는데 위에서 보고 좋아하셨으면 좋겠다. 부모님께 자랑거리인 딸이 되고 싶다”고 지명 소감을 전했다.
이제 ‘자랑스러운 딸’이 되었을까. 최서현은 이 질문에 잠시 말을 멈췄다. “아직 갈 길이 멀어요. 그래도 요즘에는 엄마가 표현은 안 하시지만 주변에서 축하도 많이 받고 지인들한테 기분 좋게 밥도 사시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말을 잘 듣는 편도 아니었는데 아무 말 없이 뒷바라지해 주신 게 고마울 따름이에요. 돈 많이 벌어서 ‘금융치료’로 보답하고 싶어요. 아빠도 위에서 잘 응원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눈물이 고인 자리에는 금세 꿈과 의지가 차오른다. “이번 시즌에는 일단 신인상을 받고 싶어요. 연차가 쌓이면 주전으로 오래 뛰면서 ‘베스트7’에도 들고 싶고 국가대표도 해보고 싶어요.” 그녀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대전=한종호 기자 hj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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