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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녀의 땅’ 도효, 이틀 뒤 다카이치 총리에겐 허락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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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리키시’(원제: 성역)의 한 장면

넷플릭스 드라마 ‘리키시’(원제: 성역)의 한 장면


“스모라는 성역의 정점을 향해, 한계에 다다른 육체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지난 2023년 오티티(OTT) 넷플릭스에 공개된 일본 드라마 ‘리키시’는 스모선수들의 성장과 투혼을 다룬 수작입니다. 유도 선수 출신의 골칫덩이 주인공 오제(이치노세 와타루)가 스모 경기장인 직경 4.55m ‘도효’ 위에서 최고 선수가 되는 성장기를 그렸습니다. 정치부에서 일하다 스모 담당기자로 ‘좌천’ 당해 불만 가득한 구니시마 아스카(구쓰나 시오) 기자가 이 과정을 담담하게 지켜봅니다. 그는 자신을 극복하며 한단계씩 성장하는 선수들을 보며 “도효 안에서 선수들의 힘이 휘몰아친다. 흙투성이가 된 거구의 등에서 혼이 피어난다”는 찬사를 보냅니다.



이 드라마 제목이 한국에서는 스모 선수들을 뜻하는 ‘리키시’였지만, 원제목은 ‘성역’(Sanctuary)입니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또 가장 거친 스포츠의 하나인 스모 선수로서 어떤 역경에도 맞서싸우는 도효라는 공간 그 자체가 성역이라는 말이 어울릴지 모르겠습니다.



스모는 우리의 씨름판과 비슷한 도효 위에서 하의와 샅바의 기능을 함께 하는 ‘마와시'를 입고 상대를 밀어내거나 쓰러트려 승리를 가져오는 경기입니다. 1400년 역사를 가진 일본의 국기이기도 합니다. 특히 예전부터 도효에는 신이 깃들어 있다는 말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욱 각별한 관리를 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일본 공식 스모경기장에는 유일하게 공인된 ‘아라키다 흙’만 쓰일 수 있습니다. 하쓰노 건재공업사에서 채취부터 납품까지 전담하는 이 흙은 “물을 머금은 상태로 말리면 바싹 굳지만, 부서지지도 미끄러지지도 않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원래 스모 경기장과 함께 야구장 마운드 등에 흙을 공급하던 이 회사는 2015년 당시 요코즈나(우리 씨름의 천하장사)였던 몽골 출신 하쿠호 쇼가 “(하츠코 건재공업사의) 이 흙이 좋다”고 극찬을 한 뒤, 일본스모협회로부터 흙 공급을 전담하게 됐습니다. 흙을 채취한 뒤 반년 정도 자연건조를 비롯해 엄격히 관리한 뒤 출하되는데, 운송 과정에 걸리는 시간 동안 수분이 빠지는 정도까지 조절한다고 합니다.



신이 깃든다는 장소로서 엄격하고도 지극정성으로 관리되는 이 ‘성역’에는 또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여성들은 이제껏 올라갈 수 없는 금기의 영역이라는 뜻이 그것입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얘기지만, 지난 2018년 도효 위에서 축사하던 한 정치인이 쓰러지자 여성 간호사가 긴급처치를 위해 도효로 올라갔는데 심판이 “여성은 도효에서 내려가달라”고 방송을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실제 스모협회는 이 도효를 신성시하는 동시에 여성들이 밟을 수 없는 ‘금단의 땅’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지난 1990년 일본 첫 여성 관방장관인 모리야마 마유미 위원이 당시 가이후 도시키 총리를 대신해 우승트로피를 전달하려 했지만 스모협회가 이를 거부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후카고야마 스모협회 이사장이 “이런 (남성 중심) 사회가 하나쯤 있어도 좋다”는 발언을 했지만, 이후 일본 사회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사카부 지사, 효고현 지사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도효 위에서 인사하는 것 조차 거부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차별적 관습’이 언제 시작됐는지는 분명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모 관련 일본 언론 보도들을 보면, 여성들의 도효 출입이 금지된 것은 에도시기 그러니까 약 400여전 정도 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일본 고대 역사서인 ‘일본 서기’에는 “스모를 처음한 것은 여성”이라는 기록이 있고, 약 150여전인 메이지시대 이후에도 공인된 스모가 아닌 마을 스모경기에는 여성들도 출전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새삼 주목받는 것은 오는 23일 일본 프로스모인 ‘오즈모’ 올해 마지막 대회의 결승전이 예정돼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달 일본 역대 첫 여성으로 취임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우승자에게 트로피 시상자로 도효에 설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오즈모는 ‘혼바쇼’라고 불리는 대회를 전국을 돌며 한해 6차례 치르는데, 마지막 혼바쇼가 11월 후코오카에서 열리는 ‘규슈바쇼’입니다. 그리고 대회 마지막날을 일컫는 ‘센슈라쿠’에서 최종전이 끝나면, 우승자에게는 현직 총리 이름의 ‘총리배’가 주어집니다. 스모는 일본의 국기이자 여전히 높은 인기를 자랑하기 때문에 일본 총리가 이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아 정치적으로 비난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총리가 바쁘면 ‘정부 2인자’인 관방장관이나 그 아래 장관들이라도 참석하는 게 관례입니다. 실제 지난해엔 당시 가뜩이나 인기가 낮던 이시바 시게루 총리를 비롯해 정부 각료 누구도 시상자로 참석하지 않자 야당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것은) 있을 수 없는 대응”이라고 비판한 적도 있습니다.



23일 결승전에선 일본 오즈모에서 도효를 ‘성역’으로 부르며 여성 출입을 금지해왔던 관례, 연말 최종대회 마지막날 우승자에게 총리가 ‘총리배’를 수여하는 관례가 맞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현재 일본에선 정면 충돌을 피하는 쪽으로 결론이 날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한 것 같습니다. 일본 정부 2인자인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은 지난 11일 ‘다카이치 총리가 23일 센슈라쿠에서 시상을 할지’ 묻는 말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곧 규슈대회가 있는데 ‘센슈라쿠’(대회 최종일)에 대한 대응은 현재 결정된 게 전혀 없습니다. 다카이치 총리는 일본 스모문화에 대해 전통 문화를 소중히 한다는 뜻을 갖고 있으며, 이런 점을 고려해 정부가 적절한 대응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다카이치 총리가 ‘전통 문화를 소중히 한다’는 대목이 이미 결론을 암시한 듯한 느낌입니다.



다만 드라마 ‘리키시’ 마지막회는 결말을 보여주지 않은 채, 주인공 오제가 마지막 승부에서 거대한 체구와 최고의 기술을 가진 리키시를 상대로 돌진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23일 여전히 ‘성역’으로 남겨진 ‘현실 도효’ 위에서 반전은 있을까요?



도쿄/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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