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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새벽배송, 계속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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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쿠팡 없이 살았을까’라고 말하는 세상을 만들겠다.” 몇년 전 쿠팡의 창업자인 김범석 최고경영자(CEO)가 했다는 말이다. 이는 쿠팡의 ‘미션’이라고도 했다. 이 말을 접했을 때 잠시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난다.

쿠팡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김범석 CEO의 야망은 거의 실현됐다. 한국에서 살아가면서 쿠팡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려워졌다. 쿠팡은 노동환경과 경영방식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필수재’로 여겨졌다. 최근 SNS에서는 쿠팡을 비롯한 업체들의 새벽배송 제한 문제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찬성과 반대로만 가를 수 없는 의견이 쏟아졌고 험한 언사가 오가기도 했다.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는 일찌감치 장기간의 야간 노동을 ‘2A군 발암 요인’으로 분류했다. 인간의 생체 리듬을 거스르는 노동은 수면장애는 물론 심혈관 질환, 우울증 그리고 암 발병 위험까지 높인다. 우리가 편리하게 새벽에 받아보는 신선식품과 생필품 상자에는, 누군가의 ‘건강’이 비용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다.

야간 노동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전제다. 그런데도 새벽배송과 관련한 논의의 장은 제기될 때마다 감정적인 대립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새벽배송은 ‘편의’와 ‘건강’의 대립이 아니라 노동자 본인의 ‘건강’과 ‘생계’가 맞붙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새벽배송을 둘러싼 논란이 격화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목소리가 있다. 바로 “내 밥줄 끊지 말라”는 택배노동자 당사자들의 주장이다. 누군가는 이들을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었다’고 쉽게 비판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에게 새벽배송은 그만큼 좋은 일자리가 없는 현실 속 최후의 ‘선택’이기도 하다.

당연히 여기서 말하는 좋은 일자리는 쾌적하고 안전하며 높은 자아실현을 보장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주간 일자리에서 벌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소득’을 보장한다는 의미이며, 자영업 실패, 실직, 혹은 ‘투잡’이라도 뛰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다는 의미다. 새벽배송 종사자 중 상당수는 ‘건강에 나쁘다는 것을 잘 알지만, 당장 생계를 위해 건강을 담보로 잡힐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을 것이다.


이러니 토론을 통해 길을 찾기가 쉬울 리 없다. 한쪽에서는 노동자의 건강권을 외치며 야간 노동의 축소와 규제를 말한다. 원론적으로 백번 옳은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그 규제가 곧바로 자신의 소득 감소와 실직으로 이어진다며 격렬하게 저항한다. 이 역시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결국 ‘당신의 건강이 걱정됩니다’라는 도덕적 우려가 ‘그래서 나보고 굶어 죽으란 말이냐’는 생존의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토론 대신 ‘편리함을 누리는 소비자’와 ‘자기 건강의 위험도 모르는 노동자’라는 식의 감정적 비난이 오가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가 정말 던져야 할 질문은 ‘새벽배송을 금지해야 하는가’가 아니다. ‘왜 많은 사람이 자신의 건강을 팔아서라도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는가’부터 물어야 한다.


문제의 본질은 새벽배송이라는 현상이 아니라, 이것이 가장 나은 선택지가 되어버린 한국의 노동시장 구조다. 양질의 주간 일자리가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고, 플랫폼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최소한의 사회보호망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현실이 노동자들을 어두운 새벽 도로로 내몰고 있다.

어느 문제든 일도양단식 해결법은 없다. 새벽배송 문제는 더욱더 그러하다. 단기적으로, 또 장기적으로 차근차근 접근해야 그나마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당장은 새벽배송 노동자들이 일하다 죽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들이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도록 의무화하고, 주간 노동보다 훨씬 더 강력한 휴식 시간 보장 제도와 야간수당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런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장기적으로는 이들이 ‘건강을 팔지 않아도’ 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이는 더 나은 주간 일자리를 창출하고, 플랫폼 노동자들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안아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더 크고 근본적인 논의다.

이제 새벽배송은 멈출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흐름 속에서 누군가의 건강이 속절없이 상하는 것을 방치하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다. 건강과 생계가 제로섬 게임이 되지 않도록, 한국 사회는 더 치열하게 구조적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그러니 새벽배송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자.


홍진수 사회부장

홍진수 사회부장

홍진수 사회부장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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