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공화국 영웅’ 1호는 누구일까요? 김일성 백두혈통도 아니고 김일성과 같이 만주에서 빨치산을 했던 이른바 ‘혁명 동지’도 아닙니다. 이름도 생소한 ‘성시백’이라는 인물입니다. 대체 누구길래 김일성이 그에게 공화국 영웅 1호의 칭호를 줬을까요. 신출귀몰했던 간첩 성시백을 통해 역사의 교훈을 얻어보시죠.
대한민국의 해방정국에는 전설적인 대공 수사관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공산당의 음모를 집요하게 추적해 적발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을 것입니다. 이들의 주적은 남한에 근거를 둔 공산당, 남로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수사관들이 언젠가부터 이상한 기류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분명히 공산당의 활동 흔적이 있는데 남로당은 개입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북한의 ‘공화국 영웅’ 1호는 누구일까요? 김일성 백두혈통도 아니고 김일성과 같이 만주에서 빨치산을 했던 이른바 ‘혁명 동지’도 아닙니다. 이름도 생소한 ‘성시백’이라는 인물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
나중에야 밝혀진 것이지만 남로당보다 오히려 더 은밀하게, 그리고 훨씬 더 큰 성과를 내는 공작조직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가 존재하고 있었고, 그 총책이자 사실상의 전부인 인물이 바로 성시백입니다. 남로당의 박헌영이 남한의 주도권을 쥐는 것을 원치 않았던 김일성이 남로당과는 별도의 대남 공작기구로 직할 관리한 것이 바로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였습니다. 성시백의 활약으로 초조해진 박헌영이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남로당의 공작 활동을 상세하게 보고하도록 김삼룡에게 지시했고, 그 보고서가 대공 수사팀에 발각됨으로써 1949년 국회 프락치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기도 했던 것입니다.
성시백은 1905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 중동학교에 다니다 25살에 상하이로 가서 1935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합니다. 정향백, 정백이라는 가명으로 장개석의 국민당을 상대로 프락치 활동을 했습니다. 해방 후 1946년 부산으로 입국해 서울에서 제반 준비공작을 한 뒤 47년 월북합니다. 평양에서 김일성,김두봉과 5일에 걸쳐 비밀 모의를 마친 후 ‘대남특수공작’ 특명을 갖고 47년 5월 서울에 잠입했습니다.
성시백의 간첩활동은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데, 실제로 북한 정권은 1990년부터 성시백을 소재로 ‘붉은 단풍잎’이라는 7부작 영화까지 만들었습니다. 성시백은 남로당과 달리 공산당이라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고, 그래서 체포 후 당시 언론들은 성시백의 간첩 활동을 ‘무명당’이라고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이름없는 당’을 표방했다는 얘기죠.
성시백은 조선중앙일보, 우리신문 등 10개의 언론사를 경영하면서 암암리에 공산당의 주의 주장을 선전했습니다. 합법적인 언론사 사주일뿐더러 성시백은 대규모 무역을 하는 기업인이기도 했습니다. 서울 서소문에 본거지를 두고 1948년 2월 남북교역이 금지될 때까지 북한의 명태와, 카바이드를 독점 공급해 1억원 이상의 공작금을 확보했습니다. 카바이드는 북한이 남한으로 송전선을 일방적으로 끊으면서 대체에너지로 수요가 급증한 물질입니다. 1억원이면 지금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천억원에 가까운 액수라고 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중국 칭다오에 있는 북로당 직영 조선상사, 또 북한 밀수선 금비라호를 통한 중국과의 밀무역 등의 통로로 미화 38,800달러의 공작금을 확보했습니다.
성시백의 간첩활동은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데, 실제로 북한 정권은 1990년부터 성시백을 소재로 ‘붉은 단풍잎’이라는 7부작 영화까지 만들었습니다. 성/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
해방 당시 남북은 조선은행권을 함께 썼는데 북한은 47년 12월 1일 비밀리에 화폐개혁을 하고 구화폐 통용을 금지했습니다. 남한은 이런 사실을 모르다가 다섯 달 뒤인 1948년 4월 25일에야 구화폐 사용을 금지했는데, 이 다섯 달의 공백기 동안 북한에서 회수된 구화폐가 남한으로 유입돼 공작금으로 사용되고 경제를 교란시켰습니다. 여기에 48년 2월까지 대북 무역을 하던 성시백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처럼 천문학적인 공작금을 토대로 성시백은 남한 사회에서 크게 세가지 공작을 벌입니다.
첫째는 기밀 탐지입니다. 언론사주이자 기업인 행세를 하면서 남한 고위층과 밀접하게 접촉해 군사,정치,경제,문화 각 분야 기밀을 빼내서 무전 송수신기로 평양에 보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육군 수뇌부만 아는 원자모의 전략계획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ECA(마샬플랜 집행기구) 경제원조 계획도 보내서 소련과 북한이 방해공작에 나서게 했습니다. 성시백의 끄나풀, 즉 프락치는 주한 미 대사관, 주한 대만 대사관에까지 있었습니다. 주한 대만대사관 통역관 김석민을 통해 49년 8월 이승만과 장개석의 극비 회동 내용까지 입수했고, 미 대사관 직원 김우식은 미국 정부의 훈령을 성시백에게 빼돌렸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에 친분을 맺은 김구, 김규식 두 우익 지도자들이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것도 성시백의 작품인데 이걸로 김일성의 큰 치하를 받았다고 합니다.
둘째 공작은 국군 내부 침투입니다. 오제도 검사가 압수한 성시백의 비밀문서를 판독한 결과 공작요원이 112명에 달했는데 국방부, 육군본부, 해군통제부사령부 등 군 수뇌부에까지 조직이 침투해 있었습니다. 남로당 숙군으로 위기에 몰린 표무원, 강태무 소령의 2개 대대 월북 사건, 공군 항공기 월북사건도 성시백의 공작이었습니다. 6.25남침 직전에 전방 부대 지휘관들의 인사이동, 비상경계령 해제, 장병 외출,외박 실시 같은 국군 방어태세를 결정적으로 흐트러뜨린 것도 성시백이 사전 공작을 해놓은 결과였습니다. 1997년 5월 26일 북한 노동신문이 실은 성시백 특집 기사에는 “성시백이 남북연석회의 직전 김일성 특사로 김구에게 파견되는 등 김일성에게 최고의 신임을 받아 13개 정당협의회를 결성한 후 통일전선을 형성해 투쟁했다”라는 내용과 함께 “국회,국방부,각 병종사령부,사단,연대,헌병대,사관학교,육군 정보국,경찰 등에 조직선을 구축해 와해공작과 정보공작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라고 돼 있습니다. 게다가“성시백은 적들이 북침을 개시하면 우리 인민군대가 즉시 반격으로 남진의 길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예견하여 적 후방을 교란하기 위한 적구(적의 관할지역) 공작에도 힘을 넣었다”라는 적나라하지만, 우리에게는 뼈아픈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셋째는 대한민국의 체제를 전복시킬 뻔한 선거 개입입니다. 48년 5.10선거로 구성된 제헌의회에서 남로당과 성시백이 상당수 의원들을 포섭한 1949년 국회 프락치사건은 앞선 영상에서 설명드렸고, 앞서 말씀드린 북한 노동신문 기사도 이 내용을 강조했죠. 이어서 1950년 5월 30일 제2대 총선거가 실시되는데 성시백은 이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국회를 장악하려고 했습니다. 정부 수립 후 2년 가까이 돼서 이승만 대통령의 인기가 전 같지 않았고, 국회만 장악하면 국회를 통해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는 국가보안법 제정으로 남로당 조직은 거의 궤멸된 상태였고 대남 공작은 성시백의 독무대였습니다. 성시백은 엄청난 공작금을 바탕으로 이른바 남북협상파, 중도파 후보들의 선거자금을 대거 지원해 포섭하려 했고 실제로 구체적인 공작이 실행됐지만 총선 보름 전인 5월 15일 성시백이 극적으로 체포되면서 이 위협적인 공작은 다행히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1997년 5월 26일 북한 노동신문이 실은 성시백 특집 기사에는 “성시백이 남북연석회의 직전 김일성 특사로 김구에게 파견되는 등 김일성에게 최고의 신임을 받아 13개 정당협의회를 결성한 후 통일전선을 형성해 투쟁했다” “국회,국방부,각 병종사령부,사단,연대,헌병대,사관학교,육군 정보국,경찰 등에 조직선을 구축해 와해공작과 정보공작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라고 돼 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
이처럼 대한민국 심장부를 뒤흔든 간첩 성시백의 꼬리가 밟히기 시작한 것은 50년 2월부터입니다. 대공수사 당국은 마침내 5월 10일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 부책임자 김명용을 체포하고 암호 문건 일체와 무전기 2대를 압수했습니다. 12일 오제도 검사를 총책임자로 한 합동수사팀이 구성됐고, 남로당 서울시당 부위원장 출신으로 49년 전향한 홍민표가 김명용의 처를 끈질기게 설득해 마침내 성시백의 집 주소를 확보합니다. 5월 15일 새벽 3시 수사팀은 서울 종로구 효제동 자택을 급습해 성시백을 체포했습니다. 성시백은 처음에는 ‘나는 김승만이라는 사람’이라면서 극구 부인했지만, 앞서 홍민표가 입수한 만주에서 성시백이 김모 장군과 찍은 사진을 제시하자 “당신이 홍민표냐”라고 물으면서 정체를 시인했다고 합니다.
성시백은 체포 25일만인 6.25전쟁 발발 불과 16일 전인 6월 9일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졌습니다. 6.25전쟁 발발 불과 16일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의 남침 이틀 뒤인 27일 새벽 5시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오제도 검사는 후방 이송을 주장했지만 군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서둘러 처형했습니다. 사형 집행 전에 목사가 종교에 귀의할 의향이 있느냐고 묻자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처형됐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처형 사흘 뒤 성시백에게 공화국 영웅 1호 칭호를 수여하고 시신을 수습하라고 특별지시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고, 평양 애국열사릉에는 시신 없는 빈 무덤만 남아있습니다. 성시백과 연루된 것으로 비밀문서에 나와있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6.25 전쟁으로 수사나 재판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탈옥하거나 월북하면서 성시백 조직의 전모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
간첩 성시백 사건은 비뚤어진 이념과 확신에 사로잡힌 한 인간이 특출한 재능과 집요한 노력까지 가지고 있으면 자칫 한 국가와 체제의 운명까지 바꿀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이런 도전에 맞서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가진 헌신적인 사람들의 노력이 위대한 대한민국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사실도 보여줍니다. 성시백이 북한 정권의 ‘공화국 영웅 1호’라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온 수많은 애국지사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영웅 1호일 것입니다.
[호준석 전 국민의힘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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