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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보스턴 마라톤서 한국 선수가 1·2·3위…감독은 올림픽 챔피언 손기정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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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2002년 11월 15일 90세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1위로 들어오는 손기정 선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1위로 들어오는 손기정 선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1912~2002)은 선수로서는 일장기를 달고 뛰었지만 해방 후 마라톤 감독으로 세계에 태극기를 휘날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인 1947년 4월 19일 제51회 보스턴마라톤 대회에서 감독 손기정이 지도한 서윤복이 1등을 차지했다. 서윤복은 스승 손기정이 1935년 세운 세계 신기록 2시간 26분 42초를 12년 만에 경신한 세계 기록으로 우승했다. 2시간 25분 39초였다.

온 국민이 흥분했다. 조선일보는 ‘찬연! 우리 민족의 우수성/ 서 선수 당당 일착/ 뽀스톤 마라손 조선군 제패/ 선두에 빛나는 태극 마-크’(1947년 4월 22일 2면)라고 감격을 전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서윤복 우승을 축하하며 ‘족패천하(足覇天下)’ 휘호를 써주었다. ‘다리로 세계를 제패했다’는 뜻이다.

보스턴 마라톤 1, 2, 3등 완전 제패. 1950년 4월 21일자 1면.

보스턴 마라톤 1, 2, 3등 완전 제패. 1950년 4월 21일자 1면.


1950년 4월 19일 열린 제54회 보스턴마라톤 대회에선 세계가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손기정이 감독을 맡은 이 대회에서 함기용·송길윤·최윤칠 한국 선수 셋이 나란히 1·2·3위를 차지했다. 이제는 나라 이름이 ‘조선’이 아니라 ‘한국’이었다. 당시 신문은 ‘마라톤 한국에 개가(凱歌)/ 1·2·3등을 완전 제패’ ‘보라, 보스턴 상공에 태극기!’(1950년 4월 21일 자 1면)라며 감격스러운 소식을 전했다.

감독 손기정과 세 선수가 귀국한 6월 3일 카퍼레이드를 비롯해 대대적인 환영 행사가 열렸다. 김포 비행장부터 경무대(현 청와대 자리)까지 수만 명 인파가 몰려 환영했다. 1위를 차지한 함기용은 감독 손기정에게 공을 돌렸다. “우리 세 선수를 위하여 주야를 불구하고 지도하여 주신 손 감독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손기정은 “이런 승리는 삼천만 국민의 성원과 보도 기관의 절대적 격려에 기한 바 많다고 생각한다.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욱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승만 대통령은 “잘들 했소. 참 잘들 했소. 싸움만 아니 하면 무엇이든지 안 될 것이 없소. 다 성공할 수 있는 것이오. 이번 성공을 거울삼아 더욱 단합해서 굳세게 나아가야 할 것이오”(1950년 6월 4일 자 2면)라고 치하했다. 3주 후 북한이 남침해 6·25전쟁이 터질 줄 이때는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다.


손기정 세계신기록. 베를린 올림픽 출전한다. 1935년 11월 5일자 2면.

손기정 세계신기록. 베를린 올림픽 출전한다. 1935년 11월 5일자 2면.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인 손기정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마라톤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일본 당국은 24세 식민지 청년 손기정을 대표로 뽑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세계 신기록을 잇달아 갈아치우고 있었다. 1933년 10월 17일 조선신궁경기에서 2시간 29분 34초로 첫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1935년엔 놀라운 세계 신기록 행진을 이어갔다. 3월 21일 전일본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26분14초, 4월 27일 조선육상경기협회 주최 마라톤서 2시간25분14초, 5월 18일 전조선 마라톤 대회서 2시간24분28초로 잇달아 기록을 단축했다. 세계 육상 연맹 공인 기록은 아니었지만 기존 세계 기록에서 5분 이상 시간을 줄인 대기록이었다.

베를린 올림픽 9개월 전 드디어 공인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1935년 11월 3일 전일본 선수권 대회에서 2시간 26분 42초를 기록했다. 이후 일본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선 남승룡에 이어 2위로 다소 주춤했지만 올림픽 당시 금메달에 대한 기대는 누구보다 컸다.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참가한 조선인은 모두 7명이다. 마라톤 손기정·남승룡을 비롯해 농구 염은현·이성구·장이진, 복싱 이규환, 축구 김용식이다. 당초 축구에 김영근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최종 명단에선 빠졌다.

손기정 국제전화 인터뷰. 1938년 8월 12일자 2면.

손기정 국제전화 인터뷰. 1938년 8월 12일자 2면.


손기정은 1936년 8월 9일 열린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2시간29분19초로 올림픽 챔피언에 올랐다. 남승룡은 동메달이었다. 조선일보는 당일 호외를 내고 감격적인 우승 소식을 전했다. 도쿄~베를린 간 국제전화를 통해 경기 전에 이어 우승 후에도 소감을 전했다.

‘전화에 나온 손 군은 얼마나 기뻐하랴고 하였더니 “네! 기정이요! 하는 한마디가 시작되자 다음에는 말이 안 나오고 한참 동안 흐느끼는 울음소리만 들리더니 그다음에야 “이기고 나니까 웬일인지 기쁘기보다도 서러워만져서 남몰래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어요”…’(1936년 8월 12일 자 2면)


제목은 ‘세계 제패한 영웅의 가슴도/ 뜨거운 흥분 식자 쓸쓸한 애수(哀愁)’였다. 일장기 달고 출전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청년의 슬픔을 꾹꾹 눌러 담은 기사였다.

손기정은 훗날 황영조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태극기를 달고 금메달을 땄을 때 현장에서 지켜보고 감격에 겨워 말했다. “오늘에 이르러서야 나의 국적을 완전히 찾게 됐다. 나도 이런 시대에 뛸 수 있었다면…. 황영조가 부럽다.”(1992년 8월 11일 자 17면) 경기가 열린 날은 공교롭게도 손기정이 56년 전 베를린 대회 마라톤 경기에 출전했던 8월 9일과 같은 날이었다.

손기정 청동투구 돌아온다. 1986년 7월 29일자 11면.

손기정 청동투구 돌아온다. 1986년 7월 29일자 11면.


1986년 8월 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 우승 특별상으로 받기로 되어 있던 그리스 청동 투구를 50년 만에 돌려받았다. 그리스 브라다니 신문사는 당시 베를린 대회 조직위에 마라톤 우승자에게 줄 부상으로 2600년 전 청동 투구를 기탁했다. 조직위 측은 대회 후 “아마추어에게 상품을 줄 수 없다”는 이유로 전달하지 않고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박물관에 보관했다.

손기정은 청동 투구의 존재를 곧 알았지만 일제 통치 시기에는 호소할 수가 없었다. 1938년 베를린에서 청동 투구를 전시한 기단에 손기정 이름을 써넣었다는 기사(1938년 9월 20일 자 2면)가 실리기도 했지만 반환을 요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980년대 들어 “올림픽 투구를 돌려달라”(1981년 8월 15일 자 5면)고 여러 차례 요구했고 마침내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손기정은 “이 투구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이라며 1994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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