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파 거장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분홍색과 검은색 모자를 쓴 소녀’(1891)는 뽀얗고 통통하고 따스한 인물화로 대표되는 그의 진면목이 고스란히 드러난 명작이다. 1890년대 르누아르는 세련된 모자를 쓴 젊은 여성을 즐겨 그렸는데, 화랑에서 “이미 많으니 그만 그려도 된다”고 만류할 때조차 그러했다. 르누아르는 이 그림을 파리의 화상 폴 뒤랑 뤼엘에게 250프랑을 받고 판매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1874년 등장한 인상주의는 환호받던 장르가 아니었다. 반대였다. 비평가들은 조롱했다. “이 화가들은 미쳤지만 더 미친 자들이 있다. 그 그림을 사는 사람들이다.” 폴 뒤랑 뤼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인상파를 서양 미술의 새 후계자로 여겼던 그는 파산을 각오하면서까지 그림을 모으고 전시를 열고 화가를 후원했다. 훗날 모네가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굶어 죽었을 것”이라 말했을 정도. 인상파는 유럽이 아닌 미국에서 먼저 대박을 터뜨렸고, 이후 값이 폭등했다. 이번 전시에도 뒤랑 뤼엘에게서 흘러나온 작품이 다수 포함돼 있다.
메리 커샛이 그린 ‘봄: 정원에 서 있는 마고’(1900)는 그 점에서 의미가 깊다. 파리 교외에 살던 이웃 꼬마 마고의 천진난만한 귀여움이 오롯이 담긴 그림. 프랑스에서 활동한 이 최초의 미국 여성 인상파 화가는 당시 유럽과 미국 미술계를 잇는 가교였다. “인상주의 기치 아래 현대 미술의 혁명을 성취한 화가들의 동지, 놀라운 여성”으로 평가받던 커샛은 1870년대부터 아이들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고, 곧 그의 시그니처가 됐다. 견고한 윤곽선과 피부의 질감으로 전달되는 온기. “아이들은 자연스럽고 진실하며 의도를 숨기지 않아요.”
르누아르 ‘분홍색과 검은색 모자를 쓴 소녀’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에 걸려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1874년 등장한 인상주의는 환호받던 장르가 아니었다. 반대였다. 비평가들은 조롱했다. “이 화가들은 미쳤지만 더 미친 자들이 있다. 그 그림을 사는 사람들이다.” 폴 뒤랑 뤼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인상파를 서양 미술의 새 후계자로 여겼던 그는 파산을 각오하면서까지 그림을 모으고 전시를 열고 화가를 후원했다. 훗날 모네가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굶어 죽었을 것”이라 말했을 정도. 인상파는 유럽이 아닌 미국에서 먼저 대박을 터뜨렸고, 이후 값이 폭등했다. 이번 전시에도 뒤랑 뤼엘에게서 흘러나온 작품이 다수 포함돼 있다.
미국 최초의 여성 인상파 화가 메리 커샛이 그린 '봄: 정원에 서 있는 마고'. /메트로폴리탄박물관 |
메리 커샛이 그린 ‘봄: 정원에 서 있는 마고’(1900)는 그 점에서 의미가 깊다. 파리 교외에 살던 이웃 꼬마 마고의 천진난만한 귀여움이 오롯이 담긴 그림. 프랑스에서 활동한 이 최초의 미국 여성 인상파 화가는 당시 유럽과 미국 미술계를 잇는 가교였다. “인상주의 기치 아래 현대 미술의 혁명을 성취한 화가들의 동지, 놀라운 여성”으로 평가받던 커샛은 1870년대부터 아이들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고, 곧 그의 시그니처가 됐다. 견고한 윤곽선과 피부의 질감으로 전달되는 온기. “아이들은 자연스럽고 진실하며 의도를 숨기지 않아요.”
고흐의 '꽃 피는 과수원'을 한 관람객이 바라보고 있다. /뉴스1 |
흐린 눈을 정화하는 색채의 마술은 전시장 실내를 일순 야외로 바꿔 놓는다. 고흐의 ‘꽃피는 과수원’(1888)이 그 중심에 있다. 1888년 프랑스 아를로 터전을 옮긴 고흐는 봄이 되자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있어. 프로방스풍의 과수원을 활기차게 그려보고 싶어.” 과수원을 주제로 한 달 만에 14점의 그림을 그렸다. 살구·아몬드·사과·복숭아, 그리고 이 그림 속 매실까지 푸른 물감에 생명력이 가득하다. “이런 주제는 기운을 돋워주기 마련이지.” 농부는 없지만 그림 하단에 놓인 낫과 갈퀴가 인간의 흔적을 암시하고 있다.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왼쪽)과 고갱의 '목욕하는 타히티 여인들'. /메트로폴리탄박물관 |
그 너머에 ‘누드’라는 또 다른 풍경화가 놓여 있다. 폴 세잔은 이 벌거벗은 자연을 꾸준히 연구했고 ‘목욕하는 사람들’(1874~1875)로 남겼다. 실제 누드 모델을 그리는 데 부담을 느꼈던 그는 상상력을 발휘해 고전·르네상스 회화에서 빌려온 인체를 재현했는데, 추상화 거장 말레비치가 “세잔은 육체가 추상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하고 있었다”고 평했듯 인물의 포즈 역시 구성적 형태를 띤다. 반면 고갱의 ‘목욕하는 타히티 여인들’(1892)은 원시성을 찾아 헤맨 그가 열대의 섬 타히티에 머물며 원주민 여성들과 부대끼며 그려낸 작품이다. 이국의 강렬한 색채만큼이나 독특한 대목은 캔버스가 아닌 종이 위에 드로잉 형태로 작업한 뒤 이를 다시 캔버스에 붙여 수정한 그림이라는 점이다.
피에르 오귀스트 코 ‘봄’ 앞에서 관람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인상파 태동 이전 고전주의 화풍은 미술사(史)의 전개를 설명하는 귀한 이정표다. 어린 선남선녀가 그네에서 껴안고 있는 그림, 피에르 오귀스트 코의 ‘봄’은 1873년 파리 살롱전에서 첫선을 보였다. 화단의 유일한 등용문이던 살롱전에서 외면받던 신예들이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를 열기 바로 1년 전이다. 제목처럼 싱그럽고 낭만적이고 관능적인 이 그림은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부채·도자기·직물로도 복제됐다. 이 그림의 첫 소유자였던 미국 거물 사업가 존 울프는 “첫사랑에 취한 두 아이”를 위해 자신의 저택 가장 좋은 자리를 내줬다고 한다. 이듬해 화가는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훈장을 받았다.
라이문도 데 마드라소 이 가레타 ‘가면무도회 참가자들’. /메트로폴리탄박물관 |
햇빛 쏟아지는 무도회장 근처 온실에서 잠시 둘만의 시간을 즐기는 남녀, 스페인 유명 초상화가 라이문도 데 마드라조 이 가레타가 그린 ‘가면무도회 참가자들’(1875~1878) 역시 능숙하고 유혹적인 장면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특유의 세련된 연출, 새틴·모피·벨벳 등의 광택 처리가 몰입의 효과를 배가한다. 그는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1등상의 영예를 누렸고,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도 선출됐다. 명백한 주류(主流)라는 증거였다. 그해 미국 철도 재벌 윌리엄 헨리 밴더빌트가 이 그림을 구입했다.
카미유 피사로 ‘겨울 아침의 몽마르트르 대로’. /메트로폴리탄박물관 |
세월이 흘러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는 또 한 번의 격렬한 충격을 낳았다. 인상파를 위한 전시가 따로 열린 것이다. 인상주의가 비로소 미술계의 새로운 사조로 진입했다는 만국을 향한 선언. 인상주의의 성립에 누구보다 크게 기여한 화가가 있다. 여덟 차례 열렸던 인상주의 전시회에 빠짐없이 참여한 유일한 화가, 평생 가난했지만 그 와중에도 동료를 후원했던 통 큰 스승 카미유 피사로. ‘겨울 아침의 몽마르트 대로’(1897)는 피사로가 근처 호텔에 묵으며 “아름드리 나무 사이로 마차, 인파, 일렬로 늘어선 집들을 마치 새의 눈처럼 내려다보면서” 그린 도심 풍경이다. 풍경화이자 변화하는 당대의 초상. 커다란 길이 다음 세기를 향해 뻗어 있다.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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