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매큐언 소설 '어톤먼트'를 원작으로 둔 동명의 영화. '어톤먼트'와 '레슨'은 통제할 수 없는 사건들이 어떻게 한 인간의 삶을 뒤흔들 수 있는지 보여준다. 유니버설픽처스 |
아내가 사라졌다. 돌도 안 지난 아기와 쪽지 한 장을 남겨두고서. "나 찾지 마. 당신 잘못이 아냐. 당신을 사랑하지만 영원히 떠나는 거야. 그동안 난 잘못 살아왔어. 부디 용서해줘."
울부짖는 아기 곁에서 남편 롤런드는 허망해진다. 그러나 좌절은 잠시, 경찰은 그가 아내를 살해했다고 의심하고 수사를 시작한다. 필적 감정 후에도 경찰은 '용의자 롤런드'의 말을 믿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실종된 아내가 사망하면 남편이 범인이죠."
'버려진 한 남자'의 표정에서 출발해 그의 삶 70년을 회고하며 개인으로부터, 또 역사로부터 버림받은 인간의 초상을 사유하는 묵직한 소설이 번역 출간됐다. 노벨상 후보로 꼽히는 영국 거장 이언 매큐언의 장편 '레슨'이다. 영화 '어톤먼트'의 원작자 매큐언은 자전소설이기도 한 이번 소설에서 20세기 냉전, 쿠바 미사일 사태, 체르노빌 원전 사고, 독일 베를린장벽 붕괴, 브렉시트, 코로나19, 중국의 부상까지 세계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생(生)의 시험대에 선 인간의 무력감을 사유한다.
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문학동네 펴냄, 2만2000원 |
롤런드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비튼 사람은 그를 떠난 아내만이 아니었다. 14세 무렵 만났던 피아노 선생 미리엄도 롤런드의 내면을 손상시킨 문제적 인물이었다.
미리엄의 교습실에 소년 롤런드가 도착했을 때, 사춘기 소년은 선생의 향수 냄새에 성적 호기심을 느꼈다. 미리엄은 이를 악용해 그를 때리고 폭행하며 가르친다. '학대'에 가까운 교습 방법은 소년 롤런드를 옭아맸다.
시간이 흘러 어느 날, 소련이 미국을 겨냥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면서 종말이 가까워졌다는 두려움이 모든 세계에 엄습한다. 소년 롤런드는 용기를 내 선생의 집을 찾는다. 역시 두려움을 느낀 선생은 자신의 침대에서 제자와 해서는 안 될 관계를 맺는다. 한 세계의 붕괴를 예감하며 시작된 성애는 2년간 이어졌다. 하지만 그건 분명한 범죄였고 폭력이었다.
미리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느끼면서도, 성년이 된 롤런드는 아내 앨리사와 혼인한다.
설렜던 연인의 관계는 출산 직후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앨리사가 떠난 결정적 이유는 소설 때문이었다. '모성을 버리고 작가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자의적 선택은 오히려 앨리사를 유명 작가 반열에 올렸다. 그러나 그건 남겨진 롤런드에게 가해진 '두 번째 폭력'일 뿐이었다. 아내는 유럽 각지에서 엽서를 보내는데, 유모차를 끌며 혼자 아기를 양육했던 롤런드는 방황한다.
그사이, 세상은 '종말 연습'을 끝도 없이 반복하려는 듯이 이해하지 못할 사건으로 롤런드 주변을 감싼다. 책임감 없이 사라진 아내처럼, 자신을 착취했던 피아노 선생 미리엄처럼, 롤런드는 비자발적으로 내던져지는 삶의 무대 위에 섰고, 그건 시시각각 변화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타인의 결정에 의해, 시대의 폭력에 의해, 우연한 충돌 속에서 그저 '흘러가는' 인간만이 남겨졌을 뿐이었음을 작가 매큐언은 롤런드를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롤런드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깨닫는다.
'모든 것이 임의로 부과된 듯 보였다. 마치 어느 잊힌 장소에서 이런 상황으로, 다른 사람이 비우고 떠난 삶으로 떨어진 기분이었고, 자신이 선택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질서도 혼돈으로 흘러갈 뿐 그 반대 흐름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 같은 복잡한 실체도 결국 죽어, 이질적인 조각으로 이루어진 무질서한 덩어리가 되고, 이는 흩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죽은 자가 질서를 갖춘 생명체로 되살아나는 일은 결코 없다.'
한 사람의 삶이란 결국 일회적 개인사와 역사적 사건이라는, 두 개의 영원한 조수(潮水) 속에서 내려야 하는 강요된 선택의 총합이 아니던가?
책 제목 '레슨'은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롤런드처럼 인간이란 '스스로 배우는' 존재가 아니라 '배움을 당하는' 존재다. 의도치 않은 흐름 속에 무력하게 사건을 맞닥뜨리는 개인이 있을 뿐이며, 인생이란 '이해'함으로써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그저 '통과'하면서 관조하는 것임을 소설은 말해준다.
삶은 한 시절의 레슨으로는 완성되지 못하는 영원한 미완의 걸음이다. 수없는 레슨이 겹친 뒤에 결국 인간은 의미 너머의 무의미라는 한계점을 깨닫는다. 소설의 원제 'Lessons'가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방대한 시간을 소설이란 무대 위에 올리다 보니 롤런드가 중년을 거쳐 노년에 이르러 아내 앨리사, 첫 경험 상대 미리엄과 조우하는 장면이 차례대로 전개된다. 이 지점에서 독자는 자신이 한 번은 만나야 하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고야 만다. 출간 즉시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커커스리뷰 등 외신의 상찬을 받은 책.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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