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내란 사건 재판장 지귀연 부장판사. 한겨레 자료사진 |
이춘재 | 논설위원
전두환·노태우 군사반란(12·12 및 5·18 사건) 재판은 ‘성공한 쿠데타’를 민주적 사법제도에 따라 단죄한 역사적 재판이었다. 언론은 ‘세기의 공판’이란 말로 현대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국민은 정치군인들에 의해 뒤틀린 현대사가 바로잡히길 갈망했고, 사법부는 신속한 재판으로 호응했다. 1996년 3월11일 시작된 1심 재판은 그해 8월26일 끝났다. ‘전두환 사형, 노태우 징역 22년6개월’이 선고되기까지 169일이 걸렸다. 대법원 확정판결은 이듬해 4월17일 내려졌다. 16년 동안 기다렸던 ‘역사 바로잡기’에 걸린 기간은 불과 13개월이었다.
신속한 단죄는 1심 재판부의 ‘권위’가 바탕이 됐다. 대통령, 장관, 군 장성을 지낸 피고인들은 뉘우침이 전혀 없었고, 변호인들은 기세등등했다. 호화 ‘전관’들로 구성된 변호인단은 온갖 ‘법기술’로 훼방을 놨다. 재판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판결이 불리하게 나올 것을 예감한 변호인단은 본색을 드러냈다. 전두환 정권에서 대법관을 지낸 한 변호인이 법정에서 재판부를 향해 ‘재판을 엉터리로 진행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증인신문을 두고 재판부와 변호인단이 옥신각신하던 때였다.
그러자 1심 재판장인 김영일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라고 쏘아붙였다. 그는 “재판 진행에 대해 변호인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재판부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자기보다 나이가 열살 이상 많고 대법관까지 지낸 ‘법조 선배’한테 김 재판장은 거침이 없었다. 후배한테 호된 꾸지람을 들은 그 변호사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변호인단은 다음 공판에서 불공정 재판을 이유로 변호인을 사퇴했다. 김 재판장은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그는 “공판을 지연시키는 행위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국선변호인을 선임해 재판을 강행했다. 재판 기간 내내 김 재판장의 태도에는 카리스마가 넘쳤다. 1심 선고가 끝난 뒤 5·18 유족을 비롯한 방청객들은 그가 있는 법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법원의 신뢰가 어디서 나오는지 전·노 재판은 잘 보여준다.
최근 법정 중계를 통해 공개된 12·3 내란 사건 재판은 정반대다. 재판장인 지귀연 판사는 법원을 우습고 못 믿을 곳으로 만들고 있다. 지난 6일 열린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재판이 압권이었다. 지 판사는 방청석에서 특검팀 검사들에게 야유를 퍼붓는 극렬 지지자들에게 ‘정숙하라’고 주의를 줬다가, 변호인들에게 ‘우리가 황색언론에 공격당할 때는 왜 보호해주지 않았냐’는 황당한 항의를 들었다.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생떼였지만, 지 판사는 웃으면서 “변호인들도 잘 지켜주고 있다”고 답했다. 방청석에선 웃음, 박수와 함께 “판사님, 귀여우시다”라는 말이 나왔다. 또 지 판사가 증인신문 기일을 정하면서 “재판부 기피신청 때문에 기일이 너무 많이 빠졌다”고 말하자 변호인들은 “야단치는 거냐”고 항의했다. 지 판사는 이번에도 미소를 지으며 “아니다”라고 답했다. 국민은 내란 재판이 준엄하게 진행되길 바라는데, 지 판사는 그런 국민의 부아만 돋운다.
그의 과잉 친절이 재판 진행을 원만하게 하려는 선한 의도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태도가 재판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윤석열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곽종근 전 특수전 사령관은 윤석열과 변호인으로부터 무자비한 인신공격성 신문을 당했다. 증인의 신빙성을 흔들려는 교활한 전략인데도 지 판사는 수수방관했다. 곽 전 사령관의 단단한 성품이 아니었다면, 중요한 진술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지 판사의 윤석열 구속취소 결정은 단순한 법리 판단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차마 윤석열을 공개적으로 옹호하지 못했던 극렬 지지자들이 대놓고 ‘윤 어게인!’을 외치는 계기가 됐다. 구속 기한과 수사권 혼선 문제를 뒤섞어 12·3 내란의 본질을 왜곡하려는 법기술을 용인해 역사가 다시 한번 뒤틀릴 뻔했다. 30년 전과 다른 점은 주동자가 ‘정치군인’에서 ‘법기술자’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올해 안에 내란 재판 심리를 마치겠다던 지 판사는 내년 1월로 연기했다. 변호인들에게 계속 끌려다니면 또 공수표만 날릴 것이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은 그런 지 판사를 “믿고 지켜보겠다”고 한다. 그런 태도로는 얼마 남지 않은 사법부의 신뢰 하락을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묻는다. 지 판사는 국민의 눈에만 이상하게 보이는 건가. 판사들이 보기엔 괜찮은가.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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