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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데스크] 종묘 앞 개발, 콘크리트 같은 편견

매일경제 이지용 기자(sepiros@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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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용 부동산부장

이지용 부동산부장


대법 판결까지 뒤엎고 종묘 앞 고층 빌딩 불가론을 펼치는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허민 국가유산청장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고층 빌딩이 역사적 존엄 상징인 종묘 앞에 들어서면 유네스코 등재 취소 발작 버튼이 눌러진다는 것. 종묘도 유네스코 등록이 취소된 영국 리버풀처럼 굴욕을 당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종묘 앞 개발은 콘크리트 덩어리를 후손에 물려주는 죄악이라는 것이다.

이런 수사는 유네스코 기준을 고고한 심판대에 올려놓고 개발을 잠재적 유산 파괴자로 단정하는 것 같다. 적어도 행정이나 학자의 문법은 아니다. 대중 감성에 호소하는 정치적 문법에 가깝다.

먼저 리버풀을 보자. 유네스코는 2004년 등재할 때 리버풀의 항만·상업·문화시설 중심경관 등 도심 전체를 대상으로 했다. 애당초 역사 건축물과 종묘제례악이라는 전통행사를 묶어 등재한 종묘와는 사례가 다르다. 또 2021년 해제 사유도 세운지구 같은 단발성 고층이 아니라 무려 10년이 넘게 진행된 워터프런트 장기 프로젝트, 축구장 신축, 고층 개발이 해양 도시 전체의 원형을 바꿨다는 것이었다.

항만도시 리버풀은 20세기 후반에 쇠퇴 길을 걸었다. '항구의 심장'이라 불리던 '앨버트 도크'는 비어 있었고, 밤이 되면 관광객은커녕 주민조차 발길을 끊었다. 실업률은 25%를 넘었고, 빈곤율은 런던의 두 배에 달했다. 거리엔 마약, 범죄, 노숙이 일상이었고, 반세기 만에 인구도 반 토막이 났다.

그 도시의 선택지는 양자택일이었다. 유산을 위해 도시를 동결하든, 도시를 위해 유산의 일부 상징성을 포기하든. 리버풀은 후자를 택했다. 2021년 유네스코가 등재를 취소하던 날 영국 언론은 이렇게 썼다. "리버풀은 유산을 잃었지만, 생명을 되찾았다."

유네스코 기준은 항상 추앙받을 만한 진리인가. 일본 사도 광산은 어떻게 유네스코 유산이 됐나. 일본 사도 광산은 강제동원 기억을 비켜간 서사로 등재 추진이 진행됐고 유산 레이블의 품격 자체가 도마에 올랐다. 리버풀처럼 개발로 살아난 도시는 배척하고, 과거를 편집해 등록한 일본유산엔 관대한 구조라면, 유네스코는 인류 유산의 척도라기보다 힘의 논리로 통하는 국제 정치의 거울이다.


서울로 돌아오자. 종묘는 우리 첫 세계유산이고, 가치를 지키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의 정부처럼 유네스코를 향해 동네북을 두드려대는 방식은 자해 같다. 세운4구역은 법정 보존구역(100m) 밖 180m 지점이다. "142m 고층=등재 취소"라는 주장은 사업추진 과정의 유산보호 노력을 과잉 단순화했다.

주변 녹지와 조망축·스카이라인 후퇴·입면 디자인 색채 같은 완화 패키지를 계획대로 이행하면 경관 훼손 리스크는 관리 가능하다. 초고층의 시각 충격은 배치·폭·질감·광반사·야간조도로 좌우되며, 고도 자체가 아님을 보여주는 해외 연구도 많다.

국가유산청장이 "콘크리트 덩어리를 후손에게 물려주냐"고 한 건 더 난감하다. 후손에게 남겨주고자 하는 건 살아 있는 도시다. 산업·주거·문화가 섞여 젊은 인구가 돌아오고, 세수가 돌고, 공공서비스가 유지되는 도시.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은 합리적 보존과 진화하는 재생의 균형이다.


경제학자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도시의 승리'에서 말했다. "오래된 건물은 단지 과거를 기억하게 하지만, 새로운 도시계획은 미래를 가능케 한다." 사람을 붙잡는 도시가 결국 유산도 지킨다. 도심 재생은 후손에게 콘크리트를 떠넘기는 일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도시를 물려주는 일이다. 방법은 겁먹고 멈추는 게 아니라 더 똑똑하게 보존하고 재생해 공존하는 것이다.

[이지용 부동산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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