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부처 바위’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불암산(佛巖山)에는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슬픈 이야기가 있다.
이름도 거창한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는 계급도 군번도 없는 육군사관생 1,2기 생도 13명과 7사단 소속 군인 7명으로 구성됐다.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서울시 노원구 불암산 학도암 전경 |
‘부처 바위’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불암산(佛巖山)에는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슬픈 이야기가 있다.
이름도 거창한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는 계급도 군번도 없는 육군사관생 1,2기 생도 13명과 7사단 소속 군인 7명으로 구성됐다.
불암사와 석천암 주지 등의 도움을 받으며 6·25 전쟁 발발 직후 남하하는 북한군에 대항해 3개월여 기간 동안 북한군 후방을 교란하며 유격 활동을 펼치고 북한으로 끌려가던 주민 100여명을 구출하는 등 큰 전공을 세우고 전원 사망했다.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설명 안내판 |
호랑이 유격대가 은거지로 활용했던 불암산 내 1·2·3 땅굴(석천암 주변에 있음) 표지판이 정상가는 길에 눈에 띄고 ‘호랑이 유격대 구국 충혼비’가 남양주에서 불암사를 오르는 입구 쪽에 세워져 있다. 충혼비 앞에 놓여있는 육사생도가 착용했던 총 맞은 철모가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임진왜란 때도 사명대사가 승병들과 함께 양주에서 한양으로 넘어오는 왜군을 막기 위해 불암산 학도암 인근과 수락산에 매복했다가 노원평 전투에서 큰 승리를 했다고 하는 불암산이다.
불암산 전경 |
큰 바위로 된 봉우리가 승려의 모자(송낙)를 쓰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거대한 불상과 같다고 해 이름 붙여졌다는 불암산은 중계동 쪽에서 올려다보니 그렇게도 보인다.
높이 508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화강암을 기반암으로 한 석산(石山)으로 등산길이 험하다. 서쪽으로는 북한산이 마주 보이고, 북서쪽과 북쪽으로는 도봉산·수락산이 각각 솟아 있는데 돌아가신 임금을 지키는 산이라 하여 태릉·강릉·동구릉·광릉 등 많은 왕릉이 주변에 있다.
불암산 단풍 |
서울시 노원구와 경기도 남양주시를 경계하는 산으로 능선은 기암으로 곳곳에 바위 절벽들이 이어지고 울창한 수림도 있어 아름다운 풍취를 자아내고 있다. 탤런트 최불암 씨는 한자 이름까지 같다고 해 불암산의 명예 주인으로 위촉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부처 바위라는 산 이름 때문인지 석산임에도 오래된 사찰들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 세조 때 한양을 중심으로 왕실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사방(四方)에 원찰(願刹)을 뒀다. 동쪽에 불암사(불암산), 서쪽에 진관사(북한산), 남쪽에 삼막사(관악산), 북쪽에 승가사(북한산)를 뒀다고 한다. 남양주 방면 불암산 남쪽에 불암사(佛巖寺)가 있고 그 바로 정상 방향으로 위쪽에 마애미륵부처가 있는 석천암과 불암산성 방향으로 위쪽에는 바위 부처가 많은 천보사가 있다.
불암사 북서쪽 상계동 방면에는 정암사가 있고 남서쪽 중계동 방면에는 명성황후 마애불로 유명한 학도암(鶴到庵)이 있다.
불암산성 |
정상 부위 헬기장 옆에는 신라 때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불암산성’터에 성벽 흔적들도 남아 있다.
불암산성 |
서울 노원구 중계동 노원침례교회 앞을 지나 가파른 길을 따라 15분 정도 올라가니 ‘학도암’이다.
불암산 등산로 |
명성황후 마애불을 잠시 바라보고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가파른 길과 능선길을 교차하며 헬기장에 도착해 정상의 태극기를 바라보니 아직도 까마득하다.
거북바위 |
거북바위를 지나 암벽타기 같은 바위 절벽들을 오르니 드디어 태극기 펄럭이는 508m 불암산 정상이다.
불암산 정상 |
한쪽에는 경기도 남양주가 다른 한쪽으로 북한산, 수락산자락 아래로 노원구, 도봉구 등 서울 시내가 들어온다.
불암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내려올 때는 헬기장과 정상 사이의 불암사 길로 빠져 30여분 내려오니 불암사다.
명성황후 기도처 학도암(鶴到庵)
서울시 노원구 불암산의 학도암 가는 길 |
학도암은 조선 인조 2년(1624년) 불암사의 주지를 역임했던 무공(無空) 화상이 불암산 중턱에 학이 내려앉아 노닐던 자연 동굴이 있는 명당 터에 약사여래불을 봉안해 창건했다.
학도암 입구 |
고종 16년(1878년)엔 벽운화상이 중창했다고 한다.
학도암 약사전 |
창건했다는 자연 동굴에는 지금도 동굴법당 약사전이 있다. 서울시 노원구 불암산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교구 사찰이다.
학도암 삼성각 |
학도암은 도량의 중심부에 있는 대웅전, 자연 동굴 속에 약사여래불을 모신 약사전, 그리고 삼성각 등으로 단조로우나 조선 말기에 조성된 ‘마애관음보살좌상’과 ‘마애사리탑’ 등 특별한 문화재가 있는 곳이다.
학도암 마애사리탑 |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학도암 초입에 도착하니 입구 큰 바위에 새겨져 있는 두 개의 마애 사리탑이 가장 먼저 반긴다. 조선 순조 19년(1819년)에 조성된 마애부도로 취근 선사의 사리탑과 출가를 하지 않고 세속에 사는 불제자 월영의 영주(靈珠)탑이다.
영주(신령스러운 구슬)는 스님의 유골을 지칭하는 ‘사리’ 대신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평평한 바위 면에 음각으로 비 모양을 새기고 윗부분에 사리함을 보관하는 공간을 네모 모양으로 만든 것인데 학도암 외에도 몇 곳이 더 있다고 한다.
사리함은 사라지고 빈 공간만이 남아있다. 6·25때 호랑이 유격대가 학도암 인근에서 북한군과 유격전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때 마애부도가 총탄에 맞아 일부 훼손돼 ‘환○당 선사 취근탑’으로 취근 선사의 당호 한 글자가 사라져 버린 흔적이 그대로다.
학도암 대웅전 |
학도암 대웅전 앞마당에 들어서면 대웅전 뒤편 커다란 바위에 조각된 마애불이 곧바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
고종 7년(1870년)에 명성황후가 시주하고 당대 최고의 화승과 석공들을 모아 조성한 마애관음보살좌상으로 13.5m의 초대형이며 조선 후기 최고의 수작이라고 한다. 이 마애관음보살상은 국내에서 10번째 안에 드는 크기와 회화적 기법이 강조된 마애불이라 한다.
불암산을 오르는 많은 등산객도 발길을 멈추고 조성과 관련된 일화를 보며 마애불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학도암 전경 |
학도암 석조지장보살 좌상 |
마애불 조성과 관련한 일화는, 1866년에 명성황후가 18세 나이에 고종과 혼인하고 왕비가 됐으나, 고종은 그 이전부터 사랑했던 후궁만 찾고, 그 사이에서 첫 자식까지 낳게 됐다. 명성황후가 크게 불안해하자 한 궁녀가 불상을 조성하면 고종의 총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했고, 마침 그날 밤 명성황후는 큰 바위 위에 앉았던 학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게 된다. 너무나 생생한 꿈에 명성황후는 꿈속에서 나온 것들이 있는 절을 찾다가 학도암을 알아냈고, 그곳 바위에 관세음보살을 새겼으니 이것이 마애관음보살좌상이란 것이다.
이게 통했는지 명성황후는 차츰 고종의 사랑을 얻게 됐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순종이 되는 왕자 이척을 낳게 됐다. 이후부터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은 첫째 사랑을 얻고, 둘째 자녀를 얻으며, 셋째 자녀가 성공하는 세 가지 가피를 주는 것으로 유명세를 치르게 된다.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
마애불 가슴에 네모난 홈이 있는데, 이것은 불상 안에 사리와 불경 등을 집어넣는 복장의 흔적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바위에 새긴 마애불에는 복장이 거의 없어 매우 희귀한 경우인데 유사한 사례로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선운사 마애상 감실에는 비결(秘訣)이 들어 있었고 동학농민운동 때 이걸 꺼내 갔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불암사
경기 남양주시 불암사 표지판 |
불암산 정상에서 출발해 1.6㎞ 정도 남양주 방향으로 내려왔다. 내리막길도 경사가 심하고 바윗길이다 보니 1시간여 거리가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다. 불암사로 내려가는 길에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폭포가 불암산 폭포인 듯 보이는데 물이 많지 않아 장관을 이루진 못했다.
불암사 전경 |
호국안민의 기도도량인 불암사(佛巖寺)는 조선 세조 때 사방에 왕실의 원찰을 하나씩 정할 때 동쪽에 있다고 해 동불암(東佛巖)으로 불렸던 서울 근교 4대 명찰 중 하나로, 남양주시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불암사 전경 |
남양주 별내 쪽에서 올라오다 보면 ‘천보산 불암사’라는 현판이 붙은 일주문과 조그만 연못을 지나면 포대화상과 불암사 사적비가 있고 사천왕문을 겸한 제월루(霽月樓)가 있다.
천보산(天寶山)은 불암산의 옛 이름이며 제월루 앞에 세워져 있는 사적비에 의하면 824년(헌덕왕 16)에 구산선문 중 문경 봉암사를 근거로 개창한 희양산문(曦陽山門)을 일으킨 지증대사(智證大師)가 창건했으며, 도선국사가 중창하고 무학대사가 삼창했다고 한다.
불암사 지장전 |
불암사에는 오랜 역사를 증명하듯 보물 제591호로 지정된 석씨원류응화사적책판(釋氏源流應化事蹟冊板) 212매의 목판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동국대에 보관 중이다.
불암사 대웅전 |
‘석씨원류응화 사적’이란 석가의 일대기나 역대 승려의 법통을 이어온 경전이며 이를 1673년 자작나무판을 사용해 판각한 것으로 고창 선운사(禪雲寺)와 불암사에만 있는 귀중본이라 한다.
불암사 경판 안내문 |
한석봉이 썼다는 불암사 대웅전 현판 |
조선시대 목판인쇄 기술의 우수성을 느낄 수 있는 379매의 경판(경전을 목판에 새겨 불법을 전파)이 보관된 경판고(經板庫)와 한석봉이 썼다는 대웅전 현판을 볼 수 있었다.
불암사 12지신 석상 |
대웅전 뒤편으로 12지신 석상을 지나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웅장한 마애삼존불이 있다.
불암사 마애삼존불 |
1973년에 조성된 현대적인 마애불이어서 그런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살아있는 듯 생생하게 조각돼 있다.
불암사 마애삼존불 |
마애불 뒤편 바위 위에는 1989년에는 태국과 스리랑카에서 각각 3과와 4과의 진신사리를 모셔 와 5층 진신사리보탑을 세워서 봉안했다고 하는데 이정표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불암사 진신사리보탑 |
탑돌이 하기에 적합해 불암산 정기를 받으며 두 바퀴를 돌아본다.
바위산이라 그런지 마애불도 많고 석산의 기운도 느껴진다.
충혼비 앞을 지나다 보니 학도암을 소재로 박윤묵(1771~1849년)이 남긴 한시 시구가 호랑이 유격대의 젊은 영혼들을 다시 소환하게 한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


!["조진웅, 이유 없이 내 얼굴에 주먹질"...감독의 폭행 피해 폭로 [지금이뉴스]](/_next/image?url=https%3A%2F%2Fstatic.news.zumst.com%2Fimages%2F4%2F2025%2F12%2F08%2F202512081836219583_t.jpg&w=384&q=100)





























































